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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십리 숲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는 도종환의 시구가 떠오른다.
해남 대흥사 십리 숲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는 도종환의 시구가 떠오른다. ⓒ 김연옥
지난달 25일 우리 일행은 대흥사(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로 들어가는 십리 숲길의 늦가을 풍경에 흠뻑 취했다. 샛노랗고 빨갛게 단풍이 들어 하염없이 걷고 싶은 그 길에서 나는 가을이 오래 머물고 있음에 감사했다. 바람결에 마른 나뭇잎들이 햇빛 안고 찰랑찰랑 떨어질 때마다 모두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흥사 대웅전에서 극락의 삶을 떠올리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대웅보전.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대웅보전. ⓒ 김연옥
두륜산 대흥사(大興寺)는 지난 1992년에 대둔사(大芚寺)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가 최근 다시 대흥사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아도화상이 그 절을 세웠다는 둥 신라의 승려 정관이 세운 만일암이 그 기원이라는 둥 창건 설화는 구구하지만 정확한 창건 시점은 알 수 없다.

대흥사를 찾게 되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고승들의 사리탑과 비석이 죽 늘어선 넓은 부도밭이다. 그것은 그 절이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조선의 명찰(名刹)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어떻게 해서 국토 남단에 위치한 지방의 절집이 조선 불교의 중심 도량으로 크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 때 73세의 노구로 승병을 이끌고 나라에 공을 세웠던 서산대사의 유언에 의해 그곳에 그의 가사(袈裟)와 바리때가 전해지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다.

대흥사 가는 길의 붉은 동백꽃이 일찍 얼굴을 내밀었다.
대흥사 가는 길의 붉은 동백꽃이 일찍 얼굴을 내밀었다. ⓒ 김연옥
그런데 대흥사의 부도밭은 미황사와 달리 문을 내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잠가 놓았다. 그래서 긴 담장 너머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걷지 않아 생각지도 않게 일찍 얼굴을 내민 붉은 동백꽃을 보고 그 아쉬움을 달랬다.

우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다리를 건너 대웅전에 들어섰다. 나는 먼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전 현판을 보았다. 건물 앞면의 기둥 위쪽에 있는 용머리 장식들이 똑같은 모양이 아니고 눈의 높이를 달리 해서 변화를 준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대둔사로 불리어졌던 대흥사의 대웅보전.
대둔사로 불리어졌던 대흥사의 대웅보전. ⓒ 김연옥
그런데 대웅전 분합문짝의 태극 문양은 왠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과연 절에서는 태극 문양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대웅전 안의 기둥도 나무를 매끄럽게 다듬지 않고 생긴 그대로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세운 것이 보기에 좋았다. 그리고 봉황이 보살을 업고 있는 듯한 모습에서 나는 번뇌가 없는 극락세계의 행복한 삶을 떠올려 보았다.

대흥사 대웅보전의 분합문짝. 태극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대흥사 대웅보전의 분합문짝. 태극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 김연옥
이번 여행에서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한 김건선(통영여고) 선생의 제안으로 우리는 홍예다리 아래로 잠시 내려갔다. 그 다리 뒤로 펼쳐진 낙엽 깔린 갈색 가을이 내 가슴속으로 촉촉이 스며들었다.

다산 정약용의 뜨거운 눈물이 느껴지는 천일각

우리는 오후2시 50분께 대흥사를 떠나 다산(茶山) 정약용의 18년 유배지인 강진땅에 위치한 다산초당(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으로 달렸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다산이 1808년 봄부터 1818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날 때까지 10년 남짓 기거하며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숱한 책을 저술한 곳이다.

귤동마을에서 실학사상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르막길은 솔밭과 빽빽이 들어선 대나무들로 어두워 귀양살이의 깊은 외로움이 배어 있는 듯했다.

다산의 기나긴 유배 생활은 정조가 죽고 1801년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관직에 대거 진출한 노론의 벽파가 일으켰던 신유사옥(辛酉邪獄) 때문이었다.

신유박해라고도 하는 그 사건으로 시파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고 유배되는 등 변을 당했고 다산은 그때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뒤이어 터진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帛書)사건으로 그는 귀양살이를 강진으로 옮기게 됐다.

다산이 강진읍내 동문 밖 주막집, 보은산방(高聲寺) 등을 거쳐 다산초당으로 오게 된 것은 해남 윤씨 집안인 외가 쪽 친척 되는 윤단의 배려였다고 한다.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 마당에는 부뚜막 삼아 차를 끓여 마셨던 평평한 돌인 '다조'가  놓여 있다. 또 다산초당 옆으로 연못이 있다.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 마당에는 부뚜막 삼아 차를 끓여 마셨던 평평한 돌인 '다조'가 놓여 있다. 또 다산초당 옆으로 연못이 있다. ⓒ 김연옥
그런데 그곳에 이르자 조그마한 초가집이 아니라 번듯한 집이 우리를 반겨 힘든 귀양살이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로움과 편안함이 느껴져 어색했다. 생전의 초가가 허물어져 1958년에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그 집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마당에는 다조라고 부르는 평평한 돌이 놓여 있는데 다산은 그 돌을 부뚜막 삼아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 그리고 그는 연못을 파서 넓히기도 하고 탐진강가에서 주운 돌로 연못 가운데 조그만 봉을 쌓았다. 산에서 흐르는 물도 대나무로 만든 홈통을 거쳐 연못으로 떨어지게 하여 비류폭포라 이름 짓기도 했다.

연못 가운데 산처럼 봉을 쌓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왼쪽)과 정석바위(오른쪽).
연못 가운데 산처럼 봉을 쌓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왼쪽)과 정석바위(오른쪽). ⓒ 김연옥
큼직한 바위에 다산이 손수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를 본 후 나는 동암을 지나 천일각으로 올라갔다. 다산의 뜨거운 눈물이 느껴지는 곳이 천일각이다. 가족과 흑산도로 유배된 둘째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거기에 수없이 올라가 멀리 강진만을 바라보며 그는 아픈 가슴을 달랬을 것이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 구강포. 나는 천일각에서 다산 정약용의 뜨거운 눈물이 느껴졌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 구강포. 나는 천일각에서 다산 정약용의 뜨거운 눈물이 느껴졌다. ⓒ 김연옥
천일각이라 부르는 누각은 다산이 귀양살이했을 당시에는 없던 것으로 1975년에 강진군에서 세웠다. 천일각에서 오솔길 따라 늦은 걸음이라도 40분 정도 걸어가면 백련사에 이르게 된다. 다산은 그 길을 통해 그 당시 백련사에 있던 혜장스님을 만나 학문과 우정을 나누었다.

대흥사의 12대강사인 혜장스님과의 인연으로 다산이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다도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은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폈던 일지암의 초의선사와의 교분도 두터웠다. 초의선사는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자 은거에 뜻을 두고 대흥사에서 두륜봉 쪽으로 40분 정도 걸리는 산 중턱에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동안 기거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대흥사 십리 숲길.
아름다운 대흥사 십리 숲길. ⓒ 김연옥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도종환 <단풍 드는 날>


우리 일행은 전남 보성군에 있는 식당에 들러 맛있는 저녁을 함께 하고 마산을 향해 깊은 어둠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도종환 시인의 <단풍 드는 날>을 천천히 읊으며 이제 가을을 떠나보낼 채비를 했다.

덧붙이는 글 | 이번 여행길에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아울러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많은 도움을 준 통영여고 김건선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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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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