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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가지
나는 좀비가 나오는 영화나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죽은 자도 아니고 산 자도 아닌 그 중간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밤중에 돌아다니는 좀비들의 꼬락서니는 무서운 게 아니라 불쾌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흡혈이라니…. 드라큘라 백작이 지저분한 몰골로 무리지어 환생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좀비가 나오는 소설을 읽었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이 책을 집어든 것은 호러소설로 유명한 스티븐 킹이 바로 이 소설을 읽고 작가가 되었다는 말에 홀렸기 때문이다. 나는 스티븐 킹은 누가 뭐라고 해도 대단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가 쓴 소설을 일일이 열거해야 하나?

<캐리> <쇼생크 탈출> <미저리> 등등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에 읽은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그 기발한 상상력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런 그에게 그러한 소설을 쓰도록 엄청난 영향을 끼친 소설이라니, 그만하면 충분히 유혹적이지 아니한가.

@BRI@리처드 매드슨은 <나는 전설이다>를 1954년에 출간했다고 한다. 좀비는 그 때 소설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사람들로 하여금 좀비가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올해, 스티븐 킹은 새로운 소설을 출간했다. <셀>이다. 휴대폰으로 인해 살아 있는 멀쩡한 사람들이 집단으로 산 자도 아니요, 죽은 자도 아닌 경계에 서게 된다는 이야기는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의 현대판 복제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셀>을 읽고 읽는 동안 나는 <나는 전설이다>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물론 내용은 다르다. 하지만 <나는 전설이다>에서 무리지어 등장하는 흡혈귀인 '좀비'와 <셀>에 등장하는 '폰 사이코'는 아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흡혈귀가 되어 버린 사람들 속에서 네빌은 홀로 살아남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 관 속에 넣어 매장을 했는데 그만 아내가 좀비가 되어 살아 돌아온다. 그 아내의 가슴에 말뚝을 박아 죽인 뒤 다시 관 속에 집어넣은 네빌. 소설이기에 망정이기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그는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네빌은 흡혈귀들이 잠든 낮에는 마늘을 손질해서 집안 곳곳에 걸어두고, 건물 안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흡혈귀들을 찾아내 가슴에 말뚝을 박아 죽이는 일을 했다. 밤이면 요새처럼 중무장된 그의 집 앞으로 흡혈귀들이 몰려와 그를 불러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한다. 여자들은 발가벗은 채 그를 집에서 불러내려고 유혹하고, 남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집을 두드린다.

좀비들은 밖에서 소동을 벌이고, 네빌은 집안에 콱 틀어박혀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낸다. 생각해보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버리고 나 혼자만 제정신으로 좀비가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산다면 어떨 것 같은가. 차라리 좀비가 되어 그들의 무리 속에 섞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 황금가지
<셀>에서는 휴대폰이 재앙의 근원이었다. 휴대폰 통화를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미쳐 버린 것이다. 그들은 휴대폰을 내던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거나, 흉기를 휘두르며 닥치는대로 죽이기 시작한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클레이는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톰을 구한다. 그리고 클레이가 묵고 있던 모텔에서 만난 앨리스까지 가세해 그들은 한 팀을 이루게 된다.

클레이는 처음부터 휴대폰이 없었고, 톰은 기르던 고양이가 휴대폰을 망가뜨린 덕분에 '폰 사이코'가 되지 않았다. 열다섯 살의 소녀 앨리스는 어머니가 폰 사이코가 되어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들자 어머니를 공격하고 겨우 살아남았다.

세상에는 폰 사이코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두 종류만 남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친 것처럼 보이던 폰 사이코들이 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세 사람. 마치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뇌가 재부팅되어 이전에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모조리 잊게 되었다는 설정인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폰 사이코가 좀비와 다른 점은? 그들은 낮에 돌아다닌다. 그것도 무리지어 먹을 것을 구하러 움직이고, 밤이면 원래 모여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잠을 잔다. 하지만 그들은 자는 것이 아니다. 가수면 상태라고 해야 하나. 몸에 상처가 나서 썩어가도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옷을 입거나 벗거나 별로 의식하지 못한다. 좀비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클레이 같은 정상인들은 낮에는 폰 사이코의 습격을 피해 주택 안으로 숨어 들어가 지내고, 폰 사이코들이 휴식을 취하는 밤에만 움직인다. 폰 사이코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클레이 일행. 결국 그들은 폰 사이코 집단을 대량학살하게 되는데, 일을 벌이는 순간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닫는다. 폰 사이코들이 정상적인 인간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폰 사이코들의 분노가 복수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폰 사이코는 좀비와 확실하게 차별화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폰 사이코는 좀비가 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긴 좀비가 처음 출현한 것은 1954년이고, 폰 사이코는 2006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사이에 긴 공백기간이 있는 만큼 현대판 좀비는 진화된 모습이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나는 전설이다>는 네빌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하지만 스티븐 킹은 <셀>의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물론 그 노래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단계이긴 하다. 그것이 정말로 희망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을 안겨주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전설이다>를 전통적인 호러소설이라고 한다면, <셀>은 일종의 재난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한 소설이다. 지구에 무서운 재앙이 닥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용감하게 재앙과 맞서 싸워 결국은 그것을 이겨낸다는 그런 내용의 영화들 말이다.

폰 사이코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총으로 중무장한 일행이 모험을 찾아 떠나는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풍겨 읽는 동안 작가가 영화로 만들어질 것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가스가 폭발하면서 떼죽음을 당하는 폰 사이코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화면에 담는다면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겠지만….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셀>은 2008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두 개의 소설을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읽었다. 절대로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벌어질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작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어떠한 뇌구조를 가졌기에 그러한 상상을 하고,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일까.

이들의 소설에 호기심이 있는 독자라면 그들의 세계 속으로 한번쯤 발을 디뎌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소설 아닌가.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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