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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름과 푸른 하늘과 흰 구름과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진 겨울 풍경.
고드름과 푸른 하늘과 흰 구름과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진 겨울 풍경. ⓒ 최성수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몸을 잔뜩 웅크리게 됩니다. 입에서는 절로 춥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내가 자꾸 춥다고 하자,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조금 걱정이 되나 봅니다.

"아빠, 추워도 보리소골 갈 거지요."

@BRI@녀석의 말은 은근히 압력까지 감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보리소골에 가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긴 내가 낳고 자란 강원도 산골짝에서야 이런 추위는 추위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한겨울이면 코끝에 매달린 콧물이 그대로 얼 정도였다면 조금 과장일까요?

"그럼, 가야지. 이 정도 추위는 우리 강원도에서는 추위도 아닙네다. 오줌을 누면 오줌발이 땅에서 고대로 얼어 올라오고, 개울에서 세수하고 들어오다 문고리를 잡으면 문고리에 물기 묻은 손이 달라붙어 영 떨어지지 않으면, 아 이거 조금 쌀쌀하구나 하지요."

나는 일부러 어느 개그맨의 수다를 흉내 내 봅니다. 그러나 내 말투가 영 어울리지 않았는지, 늦둥이 녀석은 내 말에는 아무 반응도 없이 그저 보리소골에 간다는 말에만 환호성을 질러댑니다.

노는 토요일이 아니라서 퇴근 후에 얼른 집에 들러 아이를 태우고 시골집으로 향합니다. 경기도 양평으로 들어서자 군데군데 눈이 보입니다. 그 눈을 보고 늦둥이가 또 소리를 지릅니다.

"와, 눈이다. 보리소골에는 눈이 쌓여 있을 거야."

하긴 양평에 이렇게 눈이 남아있다면, 강원도 보리소골에는 제법 쌓여 있을 만도 합니다. 안흥에서도 유난히 더 추운 골짜기인 보리소골에는 한 번 눈이 오면 봄이 올 때까지 좀체 녹지 않으니까요. 산그늘에는 늘 눈이 남아 봄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곳이 보리소골이니까요.

차가 강원도 횡성군으로 들어서니, 국도 군데군데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차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산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습니다. 그 눈을 보자 늦둥이 녀석은 더 마음이 급해지는지, 차 안에서 엉덩이를 들썩입니다.

집 들어가는 길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아무가 가지 않은 길을 처음 지나가는 마음이 설렌다.
집 들어가는 길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아무가 가지 않은 길을 처음 지나가는 마음이 설렌다. ⓒ 최성수
드디어 보리소골 초입에 들어섭니다. 길 위로 눈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차바퀴에서는 뽀드득 소리가 납니다.

"우와, 눈이다!"

녀석은 눈을 처음 보는 것처럼 신이 나 있습니다. 밭 가로 난 길을 지나고, 억새가 제 몸을 다 말린 채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길을 거쳐 우리 집에 당도합니다.

마당 가로 수북하게 눈이 쌓여 있습니다. 인삼을 심기 위해 고랑을 켜 놓은 밭에도 눈이 소복합니다. 지난봄, 눈부시게 노란 꽃을 피워냈던 집 뒤 언덕 위 개나리 숲에도 눈이 그득합니다. 온통 눈의 나라입니다. 이곳이야말로 이제 설국입니다, 눈의 나라.

차에서 내리자마자 늦둥이는 집 안에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눈밭에서 뒹굽니다. 아내가 얼른 불러들여 장갑과 두툼한 옷을 입혀줍니다. 녀석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길을 내고, 도시를 꾸밉니다. 녀석이야말로 지금 설국을 건설 중인지도 모릅니다.

마당과 집 옆 언덕의 개나리 숲에도 눈이 그득하다.
마당과 집 옆 언덕의 개나리 숲에도 눈이 그득하다. ⓒ 최성수
나는 천천히 발길을 옮겨 집 주변을 살펴봅니다. 큰 낙엽송을 베어 그냥 던져 놓은 나무다리를 건너 옛날 집으로 가 봅니다. 진흙 벽에 슬레이트 지붕인 옛 집은 내가 오래전 내려와 머물던 곳입니다.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고, 인간의 마을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 나는 그 집에서 내 안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나무를 때 구들을 데우고, 숯불에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마치 어린 짐승처럼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던 그때, 나는 소위 해직교사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새벽이면 더 더워지던 방구들과, 아침에 나가보면 하얗게 쌓여 있던 함박눈과, 나뭇가지 위에서 갑자기 툭툭 떨어져 내리던 눈을 말입니다.

이제 그런 겨울이 다시 오지는 않겠지요. 이미 나는 열정이 식어버린 나이가 되었고, 열정이 식은 만큼 현실에 매몰돼 더는 상처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요.

옛 집 처마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한낮에 녹은 지붕 위의 눈이 흘러내리다가 저렇게 얼어 고드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눈이 녹아 물이 되고, 그 물이 얼어 다시 고드름이 됩니다.

마당에서 늦둥이가 눈의 나라를 세우고 있다.
마당에서 늦둥이가 눈의 나라를 세우고 있다. ⓒ 최성수
옛 집에 매달린 고드름. 흙벽집과 고드름은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궁합 아닐까?
옛 집에 매달린 고드름. 흙벽집과 고드름은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궁합 아닐까? ⓒ 최성수
세상의 이치도 그런 건지 모릅니다. 한때 나는 눈이었고, 또 한때 나는 물이었고, 지금은 고드름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다시 녹아 물이 되겠지요. 사람은 늘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고드름을 보며 새삼 생각합니다.

고드름 너머로 하늘이 더없이 파랗습니다. 흰 구름 몇 점도 고드름의 배경처럼 떠 있습니다.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고드름을 바라봅니다. 정말 오랜만에 바라보는 고드름입니다.

어린 시절, 처마 끝에서 땅에 닿을 듯 열린 고드름을 따 쪽쪽 빨아먹던 기억이 납니다. 제 키보다도 긴 고드름을 들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드름 노래를 불렀던 기억도 납니다. 나는 나직하게 옛날 부르던 동요를 중얼거려봅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각시님 각시님 안녕하셔요
낮에는 해님이 문안오시고
밤에는 달님이 놀러 오시네


한번 눈이 오면 좀체 녹을 생각을 하지 않던 어린 시절의 이곳은 내 그리움의 원천입니다. 고드름을 따 동네 아이들과 칼싸움을 하며, 또 온 산을 헤매며 가마니 썰매를 타고, 콧물을 흘리며 눈밭을 헤매던 그때, 나는 행복했었다고 새삼 되뇌어봅니다.

고드름은 금방이라도 푸른 하늘 위로 날아 올라갈 것만 같다.
고드름은 금방이라도 푸른 하늘 위로 날아 올라갈 것만 같다. ⓒ 최성수
마당을 건너다보니, 늦둥이는 여전히 눈밭에서 길을 닦고 도시를 만들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녀석은 지금 자기만의 나라를 세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천천히 눈길을 걸어 집 마당으로 돌아옵니다. 마당 가득 눈의 나라를 만들던 늦둥이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습니다. 그런 녀석의 볼이 찬 바람에 바알갛게 물들어 있습니다.

"여기는 자동차 도로고요, 여기는 기차역, 여기는 집이에요."

녀석은 내게 제가 만든 눈 나라를 열심히 설명합니다.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자기 나라를 세우며 마침내 어른이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늦둥이는 지금 제 나라를 만들어놓고 그 기쁨에 한껏 취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세상의 온갖 때에 절어, 저 늦둥이만한 나이였을 때 내가 가졌던 꿈을 다 잊어버린 지도 모릅니다. 눈이 온 것에 감동하지도 않고, 찬 바람에 나가 놀 줄도 모릅니다. 그저 눈이 내리면 길이 미끄러울까 걱정하고, 바람이 불면 몸이 추울까 두려워합니다.

꿈을 잃어버린 삶이란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나도 안다는 듯 집 뒤 언덕의 잣나무에서 툭 하고 눈덩이가 떨어집니다. 그 소리에 내 마음 한구석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고드름을 하나 따 봐야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걸어 뒷산 숲길을 걸어봐야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러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듯,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꿈에 입김을 호호 불어넣습니다. 어쩌면 그 입김에 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의 꿈도 되살아올지도 모를 테니까요.

그런 헛된 꿈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시리게 푸릅니다. 그리고 겨울이 점점 깊어가고 있습니다.

길게 늘어진 고드름. 어린 날 나는 내 키보다 긴 고드름을 장난감 삼아 놀곤 했다. 그 겨울이 그립다.
길게 늘어진 고드름. 어린 날 나는 내 키보다 긴 고드름을 장난감 삼아 놀곤 했다. 그 겨울이 그립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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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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