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상당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e-learning 원격연수가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수 담당자가 희망조사도 하지 않은 채 '일괄 참여' 형태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군부독재 시절도 아니고 이런 파쇼행정이 또 어디 있는가.
이게 바로 관료주의적 '내려받기 행정'의 표본이 아니고 무엇인가. 교육력 제고와 교육행정 업무의 혁신이라는 본래 목적은 오간 데 없고, 시도교육청 평가가 일방통행식 관료주의 행정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매출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야 할 민간 기업에서나 통용될 법한 성과관리시스템(BSC)이 교육행정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교육철학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 이름도 생소한 '교육청 브랜드'를 보라. 본디 '혁신 브랜드'란 민간 기업에서 서비스와 상품의 차별화를 위해 만들어내는 이름이나 이미지를 브랜드(Brand)로 개발하여 고객신뢰와 이익창출을 돕는 것이다.
교육청 혁신 브랜드는 천박한 교육철학의 단면을 보여 준다
학부모를 고객으로 바라보고 행정시스템과 서비스를 브랜드로 육성․발전시킨다는 취지인 듯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말 아니다. 내부고객은 뭐고 외부고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을 기르는 게 교육일진대 무슨 브랜드가 필요한가. 한술 더 떠서 이를 평가해서 점수까지 매긴다니 외국인들이 보면 박장대소를 할 일이다.
아래는 지난 12월 4일, 대전시교육청이 확정 선포한 대전교육 혁신브랜드 슬로건이다. 브랜드 오른편의 웃는 형상 eje는 'Everybody Joyful Education'의 약자이기도 하다는데, 그냥 부르기 쉬운 우리말로 "모두가 즐거운 대전교육!" 이렇게 하면 안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도교육청에서 이렇게 평가에 집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부가 평가 결과에 따라 예산을 차등 지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포상 성격의 추가 지원금이라 해도 1등과 꼴찌 교육청의 차액이 수십억에 이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순위를 부여받은 시도교육청에서는 학교평가를 실시해 이제 학교를 등급 매긴다. 각 시도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1등과 꼴찌 학교 간 차등 지급액은 수백만 원까지 차이가 난다. 기관장의 명예와 실적, 게다가 포상금까지 경쟁의 동기유발은 충분한 셈이다.
교원평가의 궁극적 목표는 구조조정과 교육재정의 축소
교육부는 이제 학교가 개별 교사를 평가할 차례라고 하면서 교원평가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지금도 모든 교사는 근무평정을 통해 해마다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더하여 또 다른 계량화 평가를 덧씌우겠다는 것이다.
교원평가가 전문성 신장을 돕게 될 것이라는 교육부의 거짓 선전과는 달리, 교원평가는 궁극적으로 인력의 구조조정과 교육재정의 축소를 목표로 한다. 미국, 영국, 일본 등 교원평가를 시행한 나라들은 모두 그런 경로를 밟았다. 만일 교원평가 제도가 정착된다면, 교원은 계약연봉제로 갈 것이고 일본처럼 5년마다 교원자격증을 갱신하는 날이 올 것이다.
교단 황폐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교사들은 예전처럼 동료와 협력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아이들에게 잘 보이려고 개그를 연구하고 피자 가게 명함을 지니고 다닐 것이다. 어차피 교육경력, 수업시수, 담임 여부 등 그 어느 것도 교원평가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잣대가 될 수 없으므로, 결국 아이들의 성적이 교원평가의 기준이 될 것이다.
전교조가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학업성취도평가 결과 가르치는 반 아이들의 성적이 선생님의 등급을 결정하는 칼날이 되는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마땅히 국가가 책임져야 할 공교육을 개별 교사와 학부모의 부담으로 떠넘기는 반교육을 차단하자는 것이다.
화려한 겉포장과 슬로건, 그 속에 과연 우리 아이들은 있는가?
이제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교육당국에서 시도교육청 평가, 학교평가 등 성과주의 탁상행정과 전시행정에 몰입하고 있는 동안, 죄 없는 우리 아이들은 학업 스트레스와 사교육, 학교폭력 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고 심지어 자살로까지 내몰리고 있다. 이 끔직한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2008년 대학입시 제도를 두고 청소년들은 "내신-수능-논술! 이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나라 강제 자율학습은 세계 해외 토픽에서도 불가사의한 일로 소개된 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갇혀 있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시도교육청평가-학교평가-교원평가' 뿔이 세 개 달린 더 무서운 괴물이 다가오고 있다. 이른 바 '평가의 트라이앵글'이다. 앞의 두 개는 이미 뿌리를 내려 무서운 속도로 자라고 있고, 교원평가라는 마지막 뿔마저 곧 모습을 드러낼 기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우리 아이들을 잡아먹고 있다. 살려내야 한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다. 우리가 부정의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 말고 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