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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lf-Portrait
ⓒ 에곤 실레
"혜안이 있는 열 명을 포함한 천 명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 명의 천재, 한 명의 발명자, 한 명의 창조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몇 천 명이나 됩니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훌륭한 사람과 앞으로 훌륭하게 될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듭니다." (에곤 실레 '페슈카에게 보낸 편지', 1910)


@BRI@자신의 훌륭함이 마음에 든다는 한 예술가의 편지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신감 혹은 오만일지도 모르는 그 당당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에곤 실레, 28세로 요절한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을 보았다. 자기 자신을 괴팍스럽게 그려낸 자화상, 그리고 소녀들의 누드. 실레는 누드 그림에서 성기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 적나라한 묘사를 일삼았다. 처음 바라본 에곤 실레의 작품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왜일까? 에곤 실레라는 예술가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충격 속에 자리 잡은 그의 예술의 깊이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작품을 단지 외설이나 음란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에곤 실레의 그림 속에는 이 미술 문외한의 눈으로 보기에도 아주 진지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곤 실레를 만나다

▲ 구로이 센지, <에곤 실레, 발가벗은 영혼>
ⓒ 다빈치
구로이 센지가 쓴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은 그런 내게 에곤 실레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더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을 역장인 아버지 아돌프 실레와 어머니 마리 실레 사이에서 태어난다. 외아들이자 셋째였다. 보기에는 평온해 보였을 실레의 가정. 하지만 아버지는 매독성 질환을 앓다가 치료를 거부해 결국 죽음에 이른다. 성장과정에서 닥친 상처는 그의 인격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실레는 겉으로는 이런 상처를 보듬어낸다. 그리고 일언반구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위장된 모습이었다. 평온했던 모습과 달리, 가슴 속은 문드러지고 상처 입었다.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른이 된 그에게 잃어버린 황금기로서 유년 시절, 즉 그리움의 시선으로 바라본 꿈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실레의 작품을 접한 내 눈에 비치는 것은 흐드러지게 핀 꽃이나 바람에 살랑대는 풀 사이에서 가만히 서 있는 신경질적인 어린아이의 영상이다."

저자의 말처럼 에곤 실레의 작품 곳곳에는 정신적 소요에서 비롯된 것 같은 이미지가 드러난다. 이런 실레에게 배움의 과정은 지루한 일상이었을 뿐이다. 결국 반항적인 성격으로 그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하지만 퇴학은 실레의 예술에서 새로운 시작이자 출발이었다.

발리와 클림트, 피할 수 없는 운명

작품명 <키스>로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프, 그리고 클림트의 소개로 알게 된 모델 발레리에 노이칠(발리). 이 두 사람은 클림트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이 둘과의 관계가 실레를 완성시켰다.

클림트는 실레보다 30살 가까이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클림트는 실레를 친구로 대했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둘은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해 미술계에 큰 파장을 던지기도 했다. 클림트가 운명했을 때는 실레가 찾아와 그 마지막 모습을 담았다. 떨리는 손으로 친구의 마지막을 담고자 했던 마음에서 둘의 각별했던 우정이 드러난다.

발리는 클림트가 실레에게 소개해준 모델이다. 클림트의 의중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실레의 작품세계에 큰 도움이 될 모델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 후 클림트의 생각대로 발리는 실레의 모델이자 연인이 된다.

화가와 모델의 사랑이 시작됐다. 발리는 실레가 그린 수많은 작품 속에 등장한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실레의 누드는 발리와 함께 완성되고 있었다.

▲ Scornful Woman(Gerti Schiele)
ⓒ 에곤 실레
"1912년 4월 18일

독방안의 간이침대를 그렸다. 추레한 회색 모포 한가운데엔 이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V(발리)가 가져다준 신선한 오렌지가 놓여 있다. 그 작고 선명한 한 점이 내게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준다." (136~137쪽)


실레가 풍기문란이라는 억울한 죄명으로 23일간 옥살이를 했던 적이 있다. 실레에게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발리는 매일같이 감옥에 들러 바깥쪽 창문 틈으로 몰래 붓과 과일을 던져주었다. 그것은 감옥의 어둠속에서 신음하던 화가에게 찾아온 빛과 같은 색채였을 것이다. 발리는 실레에게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이 화가와 모델의 사랑은 실레의 일방적 변심으로 끝나고 말았다. 실레가 이웃집의 에디트와 덜컥 결혼한 것. 발리가 그 소식에 화를 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화가 난 발리는 에디트와 대면하지만, 이성적인 에디트 앞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물러난다.

그 후 발리는 먼 곳으로 떠나 군 병원 간호사가 된다. 하지만 1917년 성홍열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 사랑을 잃은 모델의 씁쓸한 죽음이었던 것 같다. 그녀와의 이별은 실레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모델과 치열하게 나눈 사랑이 끝나고 결혼으로 생활이 안정되자 실레의 작품세계에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발리를 잃음으로써 에디트를 얻은 만큼 그가 불행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예술에서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리라. (중략) 아무리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고요하고 풍부한 감정을 나타낸다고 해도 거기에는 발리와 함께 하던 시기에 그려진, 미칠 듯한 생의 에너지나 벌겋게 벗겨져 나간 신경이 밀어 올려 생겨나는 압도적인 불안, 도화와 수줍음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가시를 씹어 대는 치열함에서 오는 감동을 기대할 수가 없다." (200쪽)

평단의 인정도 받고 유명해지지만, 그 이전에 실레만이 지녔던 치열함과 격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발리와의 이별은 실레에게 옳은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현대 예술의 상황으로 보면 비극이었다. 그렇게 발리와 떨어진 후, 1918년 실레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아내와 며칠 간격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꿈은 아직껏 살아남아 사람들을 대면한다. 실레의 빛남은 어린아이 같은 격정과 순수가 있기에 가능했다. 영원한 아이. 이것이 실레를 표현하는 가장 올바른 단어일 것 같다. 그의 삶은 지극히 세속적이었고, 드라마틱한 요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가 그려낸 수많은 누드는 허위와 타락의 시대에 맞서는 창이었고 위선의 사회를 바꾸는 빛이었다.

"어린아이는 이상한 것을 본다. 이상한 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여. 어린아이의 눈에 인간이 벌거벗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서 뭐 대수란 말인가. 더구나 가장 절실한 인간이란 항상 자기 자신에 지나지 않거늘." (256쪽)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던 예술가인 에곤 실레에게 찬사를 던질 수 있는 것은 그가 바라본 순수함과 세속적 삶에 때 묻지 않은 영혼 때문일 것이다.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다빈치(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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