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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 속의 청도반시
바구니 속의 청도반시 ⓒ 조명자

@BRI@지난 11월, 소싸움으로 유명한 경북 청도군 유적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청도천, 동창천의 맑은 물이 온 고을을 누비는 물 맑은 고장. 청도(淸道)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청도 입구를 들어서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 아무리 '청도반시'가 유명한 고장이라 지만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온통 감밭이었습니다. 알맞게 통통한 청도반시. 그 옛날 임금님께 바치던 진상품이었다니 맛과 향이 오죽하겠습니까.

청도반시의 특징은 씨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까닭에 진상품으로 뽑혔다나요. 임금님이 그 많은 산해진미를 모두 맛보시려면 수고를 덜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감을 잡숫다 씨를 뱉으려면 솔찬하게 귀찮았을 텐데 씨 없는 감이라니요. 볼 것 없이 "들이라!" 했을 테지요.

장연사지 삼층석탑
장연사지 삼층석탑 ⓒ 조명자

박곡리 화상 당한 부처님
박곡리 화상 당한 부처님 ⓒ 조명자
금천면 박곡리 좁은 도로 갓길. 서너 사람 들어서면 꽉 찰 것 같은 전각에 화상 당한 부처님이 계셨습니다. 보물 203호 석조여래좌상. 부처님의 얼굴, 광배와 대좌 모두가 알아 볼 수 없게 타버려 인자하고 근엄한 부처님 상호를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지요.

매전면 장연리, 청도 '장연사지' 삼층석탑입니다. 폐사지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쓸쓸함과 적막감. 그러나 장연사지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런 폐사지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크지 않으면서도 우람하고, 푸르름 속에 장쾌함이 있는 뒷산의 이미지가 그랬고 폐사지를 넉넉하게 채운 감나무 밭의 빨간 단풍이 그랬습니다. 하기야 새색시 다홍치마처럼 해말간 단풍이 지천인데 외로울 새가 있을랍디여.

보물 677호 삼층석탑이 가지는 문화재적 가치를 떠나서라도 그 석탑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며 도시락 까먹어도 좋을 만큼 편안하고 매력적이 그 곳. 석가탑 모형의 통일신라시대 쌍탑 중에서 석탑의 끝은 복발형으로 마감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동탑의 1층 탑신에서 발견된 목제 사리함도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한 목제 사리함이라는군요.

청도읍성
청도읍성 ⓒ 조명자

청도 읍성입니다. 고려초에 쌓아진 것을 선조 23년 2년여에 걸쳐 개축했다는데 성벽인지 돌담인지 구분이 안됐습니다.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돌담 같은 곳에 그만큼 널 부러진 밭떼기들이 아무렇게나 펼쳐진 모습. 낡아빠진 무성영화 필름 되돌리듯 허망함만 더했습니다.

화양읍 동천리, 아주 평범한 마을 입구 한 쪽에 엎드린 석빙고. 정말 대단하더군요. 저렇게 큰 돌 조각들을 스티로폼 다루듯 자유자재로 다룬 우리 선조들의 손재주. 이 위대함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후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석빙고
석빙고 ⓒ 조명자

얼음 창고는 신라 지증왕 때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데 조선 초기는 나무로 만든 목빙고(木氷庫)가 전부였다네요. 그러던 것이 세종 이후부터 석빙고로 바뀌기 시작했다지요. 그 석빙고 중에서도 연도가 가장 빠른 작품이 청도 석빙고랍니다.

석빙고 지붕돌
석빙고 지붕돌 ⓒ 조명자

지금 남한에 남아있는 석빙고는 모두 6개. 모두가 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보물 323호 청도 석빙고. 어찌나 튼튼한지 안에도 들어가 보고 지붕돌 위에도 올라가 보고… 즐거운 체험학습이 따로 없었습니다.

자계서원
자계서원 ⓒ 조명자

그리고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을 다녀왔습니다. 자계서원, 탁영 김일손 선생이 건립한 서원입니다. 그 유명한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대표적 희생자였지요.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훈구대신들에게 당한 사화입니다.

조선 성종 때 사림파의 거두였던 점필제 김종직은 진나라 항우가 의제를 폐한 일을 비판하며 '조의제문' 즉 의제를 조의 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비록 항우를 비판하고 의제를 조의 하는 글이었지만 그 속엔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왕위찬탈의 부당함을 꼬집는 의미도 숨어 있었겠지요.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성종 때 사관으로 있었던 김일손이 스승 점필재 선생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삽입한 것이 들통나 훈구파의 반격을 받게 된 것이 시작이라고 합니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를 당했고,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파의 주요 인사들은 사지가 찢겨지는 능지처참을 당했다니 그 참혹함에 지금도 몸서리가 쳐지네요. 자계서원의 자계(紫溪)도 무오사화의 화를 입은 유생들의 붉은 피가 사흘 동안 냇가를 적셨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자계서원을 금빛으로 수놓은 은행잎
자계서원을 금빛으로 수놓은 은행잎 ⓒ 조명자

붉다 못해 자줏빛 핏물이 냇가를 수삼일 적셨다는데 그 옛날 희생자들의 원혼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원 마당 한 쪽에 우람한 자태를 뽐내는 은행나무의 황금빛 이파리는 제 세상 만난 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자계서원 골목길에 붙은 어느 집 문지방 옆. 감 따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주인이 물색없이 던져놓은 대소쿠리에 음전히 앉아있는 청도반시만 간짓대 벗삼아 도란도란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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