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지금의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공산주의는 사실상 소멸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공산주의와 공산주의를 꿈꾸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아직도 공산주의는 건재하다고 믿고 있고, 그것을 '하루빨리 소멸시켜야 할 뿌리깊은 악'으로 보고 있다.
공산주의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겐 공산주의란 이미 사라져버린 아쉬운 대상이지만,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이들에겐 그것은 아직도 건재한 두려운 존재인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한 사상을 놓고 사람들이 두 갈래로 나뉘게 한 것일까?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소유욕'을 들 것이고(그런 이들은 마르크스가 인간의 소유욕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이론을 세웠다고 비판한다), 어떤 이들은 성악설에 그 원인을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인간 개개인의 '권력욕'을 들기도 한다. 이상을 실현하려던 지도자 개개인이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서 결국 이상과 거리가 먼 왕국을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니엔쳉의 <상하이의 삶과 죽음>은 세 번째 예시, 권력에 눈이 먼 지도자가 변형시켜버린 공산주의 치하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니엔쳉은 대지주 가문의 후예로 영국 유학 후 중국으로 돌아와 국제석유회사인 쉘사의 상하이 지사에서 일하다가 문화혁명 때 자본가 계급으로 몰려 투쟁 대상이 된다.
상하이 제1수용소에 투옥되어 6년 6개월간 복역했던 그녀가 습기 차고 추운 지하 감방에서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남았을 때 그녀를 기다렸던 것은 혁명대원의 손에 딸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문화혁명이 끝나고 복권된 후 줄기차게 딸을 죽인 진범을 추적했으나 실패하고, 어느 날 가까스로 미국으로 탈출해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세월을 냉정하게 써내려간다.
모택동, 많은 이에겐 꿈의 상징... 또 다른 많은 이에겐 증오의 대상
@BRI@과연 재미있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회고록이라는 이 책을 펼쳐들면서 잠깐 품었던 의심은 거의 첫 장을 넘김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매혹은 첫 문장에서부터 이미 시작됐다.
… 지나간 날들은 나에게 영원히 살아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한다. 이제 나는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1966년 6월, 그 푹푹 찌는 여름밤의 상하이 우리 집 서재로 되돌아간다…
"지나간 날들은 나에게 영원히 살아 있다."
회고록으로 이보다 더한 시적 문장이 있을 수 있을까. 화자의 시적이면서도 냉정한 기술은 장을 넘길수록 그 농도를 더해갔다. 극한의 상황에 다녀온 사람이기 때문일까. 문장 하나하나에 생명력과 총기가 넘쳤다. 그리고 그 냉철하고 명석한 상황판단능력이라니. 니엔쳉은 상상을 초월한 굴욕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도 총명한 기지를 발휘해서 상황에 대처해나간다.
… "저는 우리의 위대하신 영도자 마오 주석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지요. '첫째는 고난을 두려워 마라, 둘째는 죽음을 두려워 마라'라고요."
"그 말씀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오. 그것은 해방군 병사들을 위한 것이오."
신문관이 거짓말을 함으로써 나에게 도덕적 우위를 내준 이래 내 기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이제 나는 이 신문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어둡고 눅눅한 감방에서 이야기할 상대도 없이 홀로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긴박한 순간,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굴욕적인 순간들에도 상대방과 정신싸움을 벌이며 자신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이 총명하고 강한 영혼을 독자들은 결국 손에 땀을 쥐고 응원하게 된다.
버텨라. 조금만 버텨라. 살아남아서 후세에 당신이 겪은 것들을 생생하게 증언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당신이 받았던 굴욕의 순간들이 값진 것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두 번째 권을 지나 화자가 드디어 복권되고 미국으로의 탈출이 성공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던 독자는 어느덧 작가와 일체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모택동은 많은 이들에게 꿈의 상징이지만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치를 떨며 증오하는 대상이다. 전자는 그가 역대 왕조들에게 억압받았던 중국민족들을 해방시키고 평등하게 다 같이 잘사는 삶을 꿈꾸게 해주었다는 점을 높이 사고, 후자는 '다 같이 잘 산다'고 말하면서 모택동 개인과 그 일가(문화혁명의 주도세력이었던 부인 강청을 포함한)의 개인적 영달과 복수극을 벌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점을 부각시킨다.
이 책을 읽으면 후자의 시선에 더 강한 공감대를 가지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선동되어 선량한 이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단지 부모의 출신성분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가.
모택동 치하의 중국의 '과'를 냉철하게 기술한 현대사 고발서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웃에 사는 조선족 아주머니네 놀러 갔더니 아주머니가 푸념을 했다.
"내가 나와서 돈 버는 것도 다 중국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내주기 위해서야. 삼 년만 여기서 일해서 집 사려고 해."
나는 "아줌마, 나이도 있으신데 아직 집이 없으세요?"라고 반문하면서 문득 전날 읽었던 책이 생각나서 다시 물어보았다.
"중국에 지금 못사는 사람이 많은가요?"
"그럼, 못사는 게 아니라 거의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아.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차이가 굉장히 심해."
"아줌마, 그럼 옛날에 공산주의 할 때는 어땠어요? 그때는 정말 사람들이 다 똑같이 살았나요? 못사는 사람 잘사는 사람 없었어요?"
그러자 아주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온화해졌다.
"그럼. 그때는 말이지, 다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살았어. 지금처럼 못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 일단 집이 없는 사람은 없었거든. 국가에서 다 줬으니까."
나는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다.
"어머 그럼 모택동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네요?"
"모택동? 그럼. 그 사람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그 사람 있을 땐 중국사람들 이렇게 안 살았어."
한 사람 안에는 정말로 많은 요소가 있다. 특히 그 사람이 지도자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결국 나는 니엔쳉의 모택동도, 조선족 아줌마의 모택동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모두 있는 그대로 밝혀져야 한다. 그래서 훗날을 살아가는 이들이 그 인물 안에 있었던 수많은 역사적 암시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차피 지도자의 운명을 갖게 되는 이들의 내면에 '일관성'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특히나 '공산주의'라는 뜨거운 화두를 대표했던 공산권 국가의 지도자인 경우에는 말이다.
이 책은 모택동 치하 공산 중국의 '과'를 냉철하게 기술한 현대사 고발서이다. 그리고 니엔쳉은 모택동 지지자들과 모택동을 비난하는 이들 모두에게 당시 중국의 정황이 어땠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