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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침에 늦었다. 아이들과 나가는 길은 항상 버둥댄다. 아이들 세수 씻기랴, 옷 입히랴, 뭐 준비하랴 하다보면 항상 시간에 쫒기 듯하다. 오늘도 근처에 있는 에덴교회에 나갔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교회 나가는 걸 생각할 때 그래도 그동안 보아왔던 교회라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기존의 교회처럼 형식을 따지고 복음주의 형태의 교회가 아니어서 좋았다. 내가 나가게 된 교회는 에덴교회라고 주일날 교인들이 교회에 뺑 둘러앉아 성경과 설교 내용을 돌아가며 읽는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 하고 예배를 끝낸다. 일반 교회처럼 목사님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교회당에 앉아 듣는 식이 아니라 뺑 둘러앉아 서로 쌍방형의 의사소통을 하는 예배형식이라 부담감이 적었다. 예배가 끝나면 밑에 공간에 식사가 준비가 되어 있다. 돌아가면서 성도들이 준비하는 식사 또한 나눔의 시간이다. 먹을 것을 나누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며 성도들끼리 교제를 하고 간단히 성경을 읽는다.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 건 그러니까 10살 정도 될 때였다. 달밤에 동네 친구들과 논두렁도 지나고 도랑도 건너고 해서 갔는데 아마 그때가 성탄절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사탕을 얻어먹으러 갔는데 그때 배운 노래가 콩 한쪽도 나눠 먹자는 노래였다. 지금까지도 머리 속에 각인되듯이 한 그 노래는 내가 살아오는데 무의식적인 교훈이 되었다.
87년 그러니까 거의 20년 전이었다. 내가 교회를 그만둔 게 거의 20여년이 지난 셈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이 마음이 약해져야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때는 정말 절망적이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누구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주 심하게 들었던 때였다. 후두쪽 병이 폐쪽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병원에서든 집에서든 모두들 나한테는 쉬쉬하고 있던 때였다.
그 후 대전으로 이사 간 나는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교회에 나가게 됐다. 그때는 교회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집에 처박혀 세계문학전집이나 읽고 외롭게 골방에서 하루 종일 살던 때였다. 일부러 햇빛 밝은 낮이 싫어 창문에 온통 이불을 뒤집어 씌어 어두컴컴하게 만들어 놓고 살아가던 때였다. 포로수용소라고 하는 2층 연립주택 살 때와 게딱지처럼 납작한 지붕 밑에 살 때 생각났던 것은 정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100권짜리였다.
그때 87년 6월항쟁 때문에 교회를 그만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대규모 시위대들이 대전 시내를 휩쓸고 다닐 때 나도 그 군중들 중에 하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후배 둘과 또 다른 친구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그때는 멀리서 부러움으로 바라보던 친구들이었다. 나중에 이야기 하다보니까 6월항쟁을 주도했던 친구들이 함께 청년운동을 조직하게 된 동료들이었다. 그때 나도 6월 항쟁을 참여하다 보니까 의식이 깨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 서적들을 탐독하고 그러다가 유물론자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데 또 얼마 전에 나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위암. 평소에 위궤양이 있는 줄은 알았는데 검사를 하고 나니 위암이라고 했다. 위를 3분에 2를 절제하고 항암치료 받고 방사선 치료까지 받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난 참으로 많은 세월을 한꺼번에 살아온 기분이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었다. 뭔가 부족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레 닥쳐온 현실에 대해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가게 된 게 교회였다. 어딘가 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었고 진정되지 못하는 나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병이 나고부터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아니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나 말고 다른 누구한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하루하루 계획 없이 사는 삶을 정리할 무엇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교회에 나가 내 생활을 정돈하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나 스스로한테도 평온을 유지하고 싶었다. 삶의 패턴을 일주일 단위로라도 쉬고 안정을 이룰 필요가 있었다. 아니 이 짧은 생을 주워담 듯 생활을 알뜰히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