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만 해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못가는 학생이 한 학교에 몇 명씩 있었다. 그런 학생들을 모아 중등과정을 가르치는 야학이 의정부에 있었다. 이름은 정도학원. 내가 대학 2학년 때부터 젊음을 쏟아부었던 곳이다.
야학은 향군회관으로 쓰던 낡은 블록 건물을 무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79년 말 재향군인회에서 부지를 팔아버리는 바람에 폐교를 맞게 되었다. 20년 야학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착잡했지만, 그보다 급한 건 가르치던 학생들을 어디로 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방에 수소문한 결과, 의정부에서 조금 떨어진 주내의 한 전수학교에서 학생들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조건은 교사 한 명이 따라오는 것.
주내농업기술학교 역시 폐교를 2년 앞둔 곳이라 학생이 몇 명 없었다. 그러다보니 전학이라기 보다 학교간 통합에 가까웠다. 사실, 무인가 시설인 야학에서 전수학교로 전학한다는 것은 학생기록부를 만들어넣는 위법행위였다. 하지만 폐교 직전의 학교라 교육청의 감사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조건으로 교사 한 명을 요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학교 선생이라고는 명목상 교장인 목사님을 제외하면 방통대(당시 2년제)에 적을 둔 사람과 신학교 입학생 여선생 두 명 뿐. 무자격 교사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나는 야학밥을 3년간이나 먹은 '베테랑'이었다. 가르친 과목은 중2, 중3 과정의 국어, 수학, 물상, 사회.
독재정권 무너지고도 계속된 '유신망령'
@BRI@그 학교에서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의 졸업을 보겠다는 생각 때문에라도 교사를 자청했을 터였다. 나는 가르치는 장소만 바뀌었다는 기분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나마 차비라도 주니, 여름에는 월급날(?)에 학생들을 데리고 근처 포도밭에 갈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가르친지 서너달 지날 무렵, 교장인 목사님을 대신해서 학교업무를 맡고 있던 방통대생 선생이 나를 불렀다. 아이들이 "저 선생님 혹시 간첩 아니냐?"고 하는데 도대체 무얼 가르쳤길래 그러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 과목에 있었다. 헌 교과서와 참고서를 구해와 학생들에게 줬기 때문에 사회 교과서는 10월 유신이 판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삼권 분립의 원칙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선생님, 그러면 검정고시에 나오면 어떻게 대답해요?" 학생들의 질문에, "이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으니 유신을 찬양하는 문제는 나오지 않을거야"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어린 아이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부터 그 학교에 있던 학생들에게 의심을 품게 만든 것이다(야학에서 전학한 아이들은 늘상 들었던 얘기니까 새로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섭섭하기도 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여기서는 대학생들이 야학에서 가르치듯이 의식화 교육을 하지 말라"는 그 선생의 말이었다.
유신 체제가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도 유신 체제에 반하는 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화 교육'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면서. 그것은 마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정신병동을 보는 공포였다. 도대체 그동안 사람들의 머리를 어떻게 세뇌시켜 놨길래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뉴라이트 교과서'를 보면서 느낀 공포감
일본 극우파의 역사교과서나 뉴라이트 '교과서 포럼'의 역사교과서 시안 보도를 접하면서 나는 그 때 느꼈던 공포를 떠올린다.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세뇌시키려는 의도, 그것은 의도 자체만으로도 공포다. 나는 묻는다. 잘못에 대한 반성 없이 진실을 감추는 교육이야말로 당신들이 말했던 '잘못된 의식화 교육'이 아닌가? 도대체 사람들을 병들게 해서 당신들이 얻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가?
덧붙이는 글 | 10월유신을 배우면서 자란 학생이나 교사를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벌써 26년 전 얘기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지금도 10월유신을 찬양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는가봅니다. 독일근세사를 읽으면서, 불황의 혼란을 이용해서 히틀러가 집권하는 상황을 유심히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