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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뮌스터.  샤갈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하다.
프라우뮌스터. 샤갈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하다. ⓒ 한대일

덕분에 취리히는 스위스의 깨끗함을 누릴려고 하는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늘 북적인다. 취리히 호수에서 타는 유람선은 관광객들한테는 새로운 인상을 심어 주고, 스위스 국립박물관과 취리히 미술관은 스위스의 역사와 예술을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준다.

성 페터 교회.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가 걸려있는 교회다.
성 페터 교회.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가 걸려있는 교회다. ⓒ 한대일

취리히는 또한 종교 유적지로도 그 이름이 높으니 거기에는 크게 3곳이 있다. 바로 성 페터 교회, 프라우뮌스터(= 성모 성당), 그리고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이다. 특히 높다랗게 솟은 대성당의 첨탑은 취리히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써 그 인기가 높다.

하지만 그로스뮌스터가 당시 스위스 종교 개혁의 중심지이자 정치 변동의 핵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요즘은 그로스뮌스터를 단순히 전망대로 보는 눈치다. 그러나 그로스뮌스터가 스위스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안다면, 과연 단순한 전망대로 취급할 수 있을까.

그로스뮌스터.  취리히 3대 교회 중 하나이다.
그로스뮌스터. 취리히 3대 교회 중 하나이다. ⓒ 한대일

영국의 위클리프와 독일의 루터에서 출발한 종교 개혁의 여파는 스위스에도 예외없이 찾아왔다. 타락한 가톨릭에 회의를 느낀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스위스 내에서 종교 개혁 운동은 점점 활발해져 갔다.

그중에서도 상공업을 위주로 함으로써 많은 문물 교류를 이루어 온 취리히는 특히 그러했다. 상공업을 통한 문물 교류는 취리히 사람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줬고, 이것이 결국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취리히의 진보적 흐름을 주도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츠빙글리였다. 그는 가톨록의 타락에 일찌감치 회의를 느끼고, 성경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페스트가 스위스를 덮치자 그는 몸소 나서서 환자들을 치료했고, 결국에는 그도 페스트에 걸렸지만 놀랍게도 되살아나기까지 했다. 게다가 교회를 빈민과 고아의 휴식처로 제공했고, 가톨릭에는 금기시되던 성직자의 결혼까지도 허용함으로써 취리히 종교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로스뮌스터.  리마트 강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로스뮌스터. 리마트 강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한대일

하지만 이런 바람은 알프스 산맥에 위치하고 있던 주(州)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산에 위치한 주들은 척박한 땅 때문에 주요 수입원을 용병을 통해서 얻을 수 밖에 없었는데, 츠빙글리는 사람의 생명으로 재산을 착복하는 것은 성경에 맞지 않다며 이를 금기시하라고 요구했다.

거기에 츠빙글리는, 산악 지역에 위치한 가톨릭 주가 개종을 하지 않을 시 식량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기 까지 했다. 이런 상황까지 치닫자 구교도 주는 츠빙글리와 신교 세력을 가만히 둘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취리히를 향해 진격했다.

가톨릭 군대가 쳐들어오자 츠빙글리는 취리히를 방어하기 위해 몸소 전장터로 출전했다. 구교도 군과 신교도 군이 마주친 장소는 취리히 근교 남쪽에 있던 카펠. 스위스 최초의 종교 전쟁이라 할 수 있었던 카펠 전투는,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시시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구교도 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단 수에서 구교도 군이 앞섰을 뿐만 아니라, 용병으로 이뤄진 구교도 군은 전투가 이미 몸에 베었기 때문에 전투 실력에 있어서도 신교도 군을 월등히 앞섰다.

스위스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던 그로스뮌스터
스위스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던 그로스뮌스터 ⓒ 한대일

이 전투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했고, 구교도 군은 그를 이교도로 규정해서 시신을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취리히를 점령한 뒤 무서운 '이교도 사냥'이 몰아닥쳐 수많은 시민들이 이교도라는 죄명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츠빙글리의 이런 개혁 정신은 스위스 전역을 파고들었고, 결국에는 종교 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칼뱅을 배출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로스뮌스터 내부
그로스뮌스터 내부 ⓒ 한대일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는, 종교 개혁의 중심자였던 츠빙글리가 목사로 있었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병자와 고아들을 돌보았고, 교회 재산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등 자신의 신념을 실행으로 옮겼다. 이렇듯 그로스뮌스터는 츠빙글리를 대표로 한 신교 개혁 세력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던 것이다.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은, 일단 츠빙글리 자체로만 본다면 실패했다. 하지만 크게 봤을 때 그것은 실패가 아닌, 새로운 성공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츠빙글리의 정신을 이어받은 칼뱅은 청교도 이념을 스위스, 유럽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전파시켰고, 이는 현재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정신 이념으로까지 발전했다.

또한 츠빙글리의 개혁에 자극을 받은 많은 신교 세력은 그 세를 불려서 30년 전쟁을 통해 기어코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교회 지하실에 있는 샤를 마뉴의 석상
교회 지하실에 있는 샤를 마뉴의 석상 ⓒ 한대일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개혁들에 대해서 벌써부터 실패니 성공이니 하는 평가가 나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근시안적 시각에 불과하다. 개혁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점은,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에서 보여지듯이 수십년 후, 심지어 수백년 후에는 가야 진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최근의 잣대로 들이대서 성급하게 개혁을 평가하기 보다, 여유있는 태도로 개혁을 미래의 관점을 통해 평가하는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입실론 (Epsilon)'이란 필명을 쓰고 있으며, 현재 개인 블로그에 '입실론의 C.A & so on Travel 가이드페이퍼'를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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