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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는 11년째 성탄을 축하하는 펼침막을 내걸고 있다.
화계사는 11년째 성탄을 축하하는 펼침막을 내걸고 있다. ⓒ 뉴스앤조이 주재일
"예수님의 탄생, 우리 모두의 기쁨!"

이맘때면 흔히 볼 수 있는 성탄 축하 펼침막 글귀입니다. 온갖 교회에서 교회 벽과 거리에 예수님의 태어남을 찬양하는 글을 써 펼쳐놓습니다. 이런 펼침막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함께 연말의 들뜬 분위기를 돋우지만,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우리 종교가 더 우월하다는 '우격다짐'으로, 그러니 당신은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강요'로 느껴져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이웃도 더러 있습니다.

@BRI@그런데 성탄 축하 펼침막은 누가 어디에 붙이느냐에 따라 흔하지 않은, 머물러 생각하게 만드는 물건이 되기도 합니다.

출퇴근길에 마을버스를 타고 지나치는 서울 수유동 한신대 앞 네거리. 이곳에도 똑같은 펼침막이 걸렸습니다. 펼침막을 걸어놓은 곳이 신학교인 한신대나 인근 교회가 아니라 '대한불교 조계종 삼각산 화계사'라는 점이 다릅니다.

화계사가 성탄을 공개적으로 축하한 것은 11년 전,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해 화계사에서 불이 세 번이나 났는데 모두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신대 김경재 교수님과 학생 20여 명이 수업을 마치고 화계사를 찾아 흉물로 변한 법당을 둘러본 뒤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사죄의 뜻을 전하고 법당 청소를 도왔습니다.

기독교인의 방화에 분노하던 현각 스님을 비롯한 외국에서 온 스님들도 한신대 학생들의 진심어린 사과에 울분이 눈 녹듯이 녹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화계사 스님들은 한신대생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몇 달 뒤 성탄 축하 펼침막을 거는 것으로 화답했습니다.

한신대가 올해 내건 석가탄신일에 걸어놓은 축하 펼침막.
한신대가 올해 내건 석가탄신일에 걸어놓은 축하 펼침막. ⓒ 뉴스앤조이 주재일
이듬해 한신대학원 학생회가 석가 탄신 축하 펼침막을 걸었습니다. 화계사의 성탄 축하에 대한 답례였습니다. 화계사와 한신대는 화기애애한 사이가 되었지만, 주변은 냉랭했습니다. 누군가 밤에 한신대 학생들이 걸어놓은 석가 탄신 축하 펼침막을 찢어놓으면, 다음날 학생들이 새로 만들어 걸어놓기를 반복했습니다.

극성스런 기독교인들이 한신대로 항의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신학교 학생들이 마귀의 괴수를 찬양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걸어놓을 수 있느냐, 학교는 그걸 말리지 않고 내버려두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김경재 전 한신대 교수는 몇 년 동안 집으로 걸려오는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고 말했습니다.

한신대와 학생들은 기독교 내부의 원성을 막아내고 화계사와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한신대는 석가탄신일에 화계사를 찾은 이들에게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내어주고, 화계사는 한신대에 절의 버스를 빌려주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화계사와 수유동성당, 송암교회가 난치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바자회를 한신대 운동장에서 펼칩니다.

지금도 여전히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항의 전화를 걸거나 펼침막을 뜯는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11년이라는 세월 동안 화계사와 한신대가 서로에게 보시하며 꾸준하게 신뢰를 쌓아온 것이 주변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화계사를 뒷마당, 한신대 운동장을 앞마당처럼 이용하는 동네 주민과 등산객들은 화계사와 한신대의 축하 펼침막 퍼레이드를 "종교라도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고 환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기독교 대안언론 <뉴스앤조이>(www.newsnjoy.co.kr)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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