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어 동전 한 닢씩 건네주고 나니 돌아서기가 무섭게 패디캡(자전거를 개조한 차)에 어린아이를 태우고 온 젊은 부부가 또다시 문밖에서 "크리스마스 뽀'를 외친다.
"나마 마스코 뽀'는 이곳 필리핀 따갈로어로 메리크리스마스란 뜻이다. 한 번 선물을 주고나면 소문이 나서 그런지 떼거리로 몰려온다. 이것이 내가 필리핀에서 처음 맞은 성탄절 아침 풍경이었다.
사실 선물과 용돈은 우리네 세뱃돈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정도로 원래 가톨릭에서 대부, 대모가 어린이게 주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 들어 가난한 아이들이 성탄절에 부잣집 대문을 두드리며 선물이나 돈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필리핀은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로 성탄절은 이 나라 최대 명절이다. 멀리 떨어진 가족들도 이때만큼은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긴 연휴를 보낸다. 관공서, 학교, 회사 할 것 없이 보통 10일 이상 연휴에 들어간다.
우리의 추석과 설 명절을 합쳐놓은 것과 맞먹을 정도로 대단하다. 도로는 귀성차량으로 주차장을 연상케 하고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려면 2~3시간은 줄을 서야 된다.
어제 저녁, 성탄전야에 폭죽 터지는 소리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였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별 모양의 빠롤(parol, 별모양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설치되고 밤이면 오색전구가 성탄분위기를 한결 고조시킨다.
한 달 전부터 집집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고 아이들을 위한 선물꾸러미가 트리아래 가득히 쌓이고 집 떠난 자녀들이 모두 돌아와 성탄전야는 집집마다 북새통을 이룰 정도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서로의 집을 방문하며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웃고 떠들며 다닌다. 집집마다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뷔페식 음식을 차려놓고 성탄 축하노래를 부르며 각종 게임을 하면서 밤을 새운다. 자정이 되자 아는 사람들로부터 메리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문자메시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밤새 옆집 가족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가장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폭죽 터지는 소리였다. 한마디로 마을 전체가 소음천국이다. 이 폭죽은 연말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국가적인 피에스타인 성탄절 행사는 오늘저녁이 진짜 성대한 것 같다. 이
동네 가장 부잣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부자가 아니다. 동네 면적의 반은 차지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 울타리 안에는 헬리콥터장이 있다. 소형 잔디 축구장이 있으며 야외 공연장이 있어 성탄절을 맞는 피에스타(지역마다 수호성인을 모시는 종교의식)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이곳의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가난한 사람은 판자 집에 7~8명이 웅크리고 살면서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데 담 넘어 세계는 또 다른 천국이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모두가 풍성한 추석명절처럼 지낸다. 그간 모은 돈으로 풍성하게 음식을 차리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지낸다. 또 모처럼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날 같아 보인다. 그래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부자 집을 찾아가 선물과 돈을 받으려 크리스마스 뽀를 외친다.
폭죽은 중국에서 전래된 문화로 한해의 불운 등을 씻어버리는 액막이 같은 행사다. 그래서 마을마다 가정마다 세를 과시할 정도로 엄청난 돈을 투자하며 폭죽을 하늘로 날려 보낸다. 성탄절이면 가진 돈을 모두 폭죽 사는데 소비해, 새해가 되면 빈털터리가 된다고 한다.
1년에 폭죽으로 인한 사상자가 수백 명에 달한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이들은 폭죽행사를 가족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재충전의 기회로 삼는 것 같아 보였다. 무더위 속에서 맞이하는 성탄절의 밤은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또 다른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