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치과에 가서 겪은 일이 떠올랐다. 임플란트 시술을 하기 위해 턱뼈를 떼다 잇몸에 붙이는 수술을 하는데 수술실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기색이었다. 얼굴을 가운으로 뒤집어쓰고 마취를 한 나는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술이 진행되는 전 과정에서 치과의사는 초보의사로 보이는 이들에게 카메라 촬영까지 해 가며 너무도 자상한 임플란트 시술강의를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구경꾼이 되어버린 내 기분이 어떤지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니 그 치과의사는 나에게 사후 양해조차 구하지 않았다.
원 제목이 '존엄을 생각하는 케어를 향해'라는 이 책 <노인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으면서 떠오른 기억이었다.
그 치과원장은 나의 오랜 친구이고, 한국군의 베트남 인민 학살을 사죄하기 위해 베트남에 가서 무료 치과봉사도 한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회원이며, '푸른치과' 운동의 핵심인 사람이었다.
이른바 사회운동을 하는 의식 있는 치과의사가 절친한 친구에게마저 이러할진대 자기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남의 도움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병든 노인들에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채 저지르는 인격적 결례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BRI@이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간병인이 밀어주는 손수레를 타고 노인시설의 이용자가 뜰을 산책하고 있을 때 담당 의사가 출근을 하면서 간병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는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눈다.
"밤새 고생하셨죠? **님은 약은 잘 드시던가요?"
"네. 잘 드시던데요."
"변은 어땠나요?"
"네. 두 번 아주 잘 누었어요."
"오늘은 진료가 없으니 그리 아세요."
"네."
그리고는 비로소 의사가 노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유유히 사무실로 들어간다.
이 광경을 놓고 그 시설 관계자 사이에서 토론이 벌어진다. 그리고 중요한 원칙이 만들어진다. 노인 이용자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노인 이용자를 옆에 놔둔 채 노인에 대한 험담은 물론 몸 상태나 병역에 대한 이야기를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노인 이용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는다. 이미 동의를 구한 정기적인 반복사항도 사전에 알리고 시행한다 등.
특히 기저귀에 대한 사례는 인상적이었다. 몇 주 전 내가 서울에 가서 큰 집에 사시는 어머니와 하루 지낼 때 어머니가 내게 한 이야기가 떠올라서였다.
자주 옷에 실례를 해서 형수는 나름대로 최고급으로 해서 기저귀를 해 드렸나 보다. 기저귀를 차는 데 대해 대 놓고 거절은 못 해도 어머니는 매우 당황하고, 또 체념하는 분위기였다. 어머니의 얘기는 이런 것이었다.
당신도 모르게 실례를 할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지만 오줌이 마려워 볼일을 봐야 하는데 맨 정신으로 기저귀에다 일을 보려고 하니 오히려 오줌이 안 나온다는 호소였다.
이 책. 즉, 책의 저자이자 노인 종합간병시설인 '종합케어센터 선빌리지'는 기저귀 사용에 대해 단호하다. 최후의 수단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더라도 면 기저귀를 사용한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는 굳이 면 기저귀를 쓰고 생리를 하는 딸애에게는 면 생리대를 권하면서 늙으신 부모에게 무심코 화학 기저귀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저귀는 똥오줌을 못 가리는 신체적 미숙아 또는 기능이 다 망가진 몸이라는 사실을 노인에게 공인시키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이때 노인이 갖는 열패감과 체념은 보통 이상이다. '선빌리지'에서는 직원과 원장이 실제 기저귀를 차고 생활을 해 보면서 시설 이용자들에게서 기저귀를 다 수거한다.
대신, 노인마다 대소변 주기를 면밀히 기록하여 여기에 맞춰 정기적으로 볼일을 보게 하여 배뇨 신경을 되살리는 방법을 쓰고 크게 성공한다.
젊고 건강하다는 단지 그 하나의 이유로 노인과 병약자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큰 무지에 빠져 있는지를 이 책은 깨닫게 해 준다. 노인의 귀가 먼 줄 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청각장애인 취급을 했는데, 알고 보니 파 내지 않은 귀지가 귀를 꽉 막고 있었다는 발견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이 시설에서는 돌봄을 받는 노인들에게 환자복을 입히지 않는다. 그들은 환자가 아닌데도 관리의 차원에서 환자복을 입혀왔던 것을 반성 한 조치다. 노인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평상복을 여러 벌 보여주며 입고 싶은 옷을 고르게 한다. 할머니들은 화장도 하게 하고 핸드백을 들고 구내 산책을 한다.
음식도 자신들이 떠먹게 한다. '선빌리지' 관계자들이 남이 떠 넣어 주는 밥을 먹어보고 내린 결론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계적으로 입에 들어오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은 생각보다 의외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존엄을 생각하는' 노인 돌봄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지만 이 책에서는 돌보는 사람의 존엄도 중요시한다. 그러나 '존엄'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존엄과 일상 속에서의 존엄은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선빌리지'에서는 자신의 존엄을 하나하나 체험하게 한다.
두 달여의 집을 고치는 일을 거의 끝내고, 이제 곧 어머니를 모시게 된 내게 아주 적절한 책이었지만 누구나 한번 읽어 볼 교양서라 해도 될 책이다.
덧붙이는 글 | <노인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노인사업을 하는 '시니어커뮤니케이션'에서 출판하였고, 번역은 박규상님이 했다. 값은 1만2000원. '종합케어센터 선빌리지'는 종합노인요양시설로 일본 기후현의 이케다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