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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선생님 오늘 저녁 모임 있는데요."
"어쩌지? 가볼 데가 있는데…."
종례를 하기 위해 교실로 들어가니 실장이 회식이 있다고 합니다. 수업끝난 뒤 병원에 입원한 친구 문병갈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참석이 어려울 거 같다고 했습니다.
"망년회도 겸한 겁니다."
"바쁘시면 저녁만이라도 함께 하세요."
"선생님 안 가시면 저희도 안 갈래요."
여기저기서 꼭 참석해달라며 팔을 잡아끕니다. 2006년 방송고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의 풍경입니다. 1학년 2반 담임으로 방송고 학생들과 생활한 지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마무리 모임에 송년회까지 겸한다고 하니 잠시라도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잠깐 들렀다 가죠."
"차 끌고 올 테니 잠깐 계세요."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더 많았던 한 해
지금까지는 주로 일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충수업, 자율학습에 얽매어 살기는 아이들이나 다를 바 없었지요. 누구나 힘들다는 고3 제자들이 졸업을 하고 각자의 대학으로 흩어져가도 새 학기가 되면 또 다른 녀석들을 데리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아옹다옹 사는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맡은 업무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송고등학교 담임이었습니다. 갖가지 이유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이들이 뒤늦게 배움의 길을 가기 위해 모인 학교입니다. 1학년 2반이란 이름으로 모여 있지만 나이도 직업도 살아온 환경도 다 다릅니다.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앳된 학생이 있는가 하면 환갑을 훌쩍 넘긴 할머니 학생도 있습니다. 화물차 끌고 전국을 누비는 학생도 있고, 다니던 회사에서 사고를 당해 지팡이와 휠체어에 의존해서 생활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24시간 편의점에서 밤새 일하는 학생도 있는가 하면 재래시장에서 한복점을 운영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자식들 대학 졸업시킨 뒤 뒤늦게 방송고에 입학한 아줌마 학생도 있고, 과수원에서 억척스럽게 땀 흘리는 아저씨 학생도 있습니다.
방송고가 어떤 곳인지 알기는 했지만 직접 담임이 되어 생활한 적이 없어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습니다. 담임인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학생이 반 이상이나 되어 수업도 부담스럽고 학급 운영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담보다 더 큰 걸 얻었습니다. 대학에 목매달고 사는 일반 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늦은 공부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 어려운 급우들을 위하고 감싸주는 따뜻한 마음, 아직도 우리 주변은 정이 넘치는 세상이란 걸 깨닫게 해준 모습…. 담임이 되어 가르쳐준 것보다 오히려 배운 게 더 많은 날들이었습니다.
따뜻한 정 넘치는 점심시간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출석 수업이 있습니다. 저녁 다섯 시가 되어야 수업이 끝나다보니 점심시간도 있습니다. 뜻 맞는 학생들끼리 가까운 식당에서 해결하기도 하고,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구마도 삶아오고 상추에 쌈장 가지고 와서 함께 먹기도 합니다.
우리 반 학생들도 함께 모여 점심을 먹습니다. 각자 준비해온 것을 나누어 먹는 것이지요.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급우들을 위해 밥도 찬도 넉넉히 준비하고, 숟가락도 여유 있게 가지고 옵니다. 넉넉함이 넘쳐 다 먹지 못하고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반 점심시간의 넉넉함에 한 몫 단단히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출석 수업이 있는 날마다 10인분 정도의 밥을 항상 준비해오는 아줌마 학생입니다. 한두 번도 힘든 일을 변함없이 계속하는 정성에 우리 반 모두가 감동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빙 둘러앉아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에서 넘치는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선생님, 1등 못해 미안해요"
"나도 젊었을 땐 노루처럼 잘 뛰었어요."
우리 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왕언니'라 불리는 할머니가 체육대회 때 여자 계주 선수를 자청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몇 해 뒤면 칠순을 바라볼 나이인데 계주를 뛰겠다는 말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지만 '왕언니'는 우리 반 대표 계주 선수가 되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왕언니'는 두 번째 주자입니다. 우리 반 첫 번째 주자는 다른 반 주자와 거의 비슷하게 선두로 달려왔습니다. 드디어 '왕언니'에게 바통이 넘어갔습니다.
"왕언니 화이팅!"
스탠드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응원을 했습니다. 학생들의 응원에 부응이라도 하듯 왕언니는 정말 잘 달렸습니다. 옛날에 노루처럼 잘 뛰었다던 말이 빈 말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30여 m 정도 선두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뒤를 바짝 따르던 다른 반 선수가 왕언니를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2등을 유지하며 세 번째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선수들에게 모두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고생했다며 달려나가 손을 잡아주는 학생도 있었고 손바닥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숨이 차 돌아오는 선수들에게 나도 고생했다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손을 흔들며 응원석으로 돌아온 왕언니가 말을 건넸습니다.
"선생님, 1등 못해 죄송해요."
"아네요. 정말 잘 뛰셨어요."
"칭찬 고마워요."
왕언니가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젊은 학생들과 똑같다며 왕언니는 그 뒤에도 여러 종목에 참여해서 땀을 흘렸습니다.
나누며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우다
올해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 마련한 송년 모임이 삼겹살 집에서 있었습니다. 방송고 1년 경험들을 술잔에 담아 나누었습니다. 힘든 때도 많았지만 정 넘치는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습니다. 3학년 마치고 졸업할 때까지 한 사람도 낙오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건배도 했습니다.
살아온 환경도, 하는 일도 다 다르지만 방송고 다니며 느끼는 마음은 같습니다. 뒤늦은 공부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 서로가 위해주고 도와주는 정성스런 마음, 졸업할 때까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안고 사는 이들입니다.
정과 꿈을 가득 안고 사는 이분들과의 만남이 2006년 한 해의 가장 값진 일입니다. 따뜻하고 정 넘치는 삶이 무언지 이분들은 내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누며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운 뜻 깊은 한 해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나만의 특종> 응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