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흑인폭동'.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흑인폭동'. ⓒ 연합뉴스

@BRI@1992년 LA 흑인폭동을 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800년대가 아니라 1990년대의 미국에서도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인종차별이 여전하다는 점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로드니 킹 사건은 흑인에 대한 백인경찰의 구타장면이 비디오로 촬영되어 알려지게 되면서 흑인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그런데 한국 혹은 미국의 한인사회가 오히려 경악한 일은 흑인들의 공분이 백인뿐만 아니라 한인들에게도 향했다는 것이다. 당시 분노한 흑인들은 한인 가게를 상대로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한인들은 '아니 왜 우리한테?'라면서 의아해했다. 국내에서도 사건 초기 뜻하지 않은 사태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해답은 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한 한인가게에 있었다. 한인이 주인인 한 주유소가 유일하게 불타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흑인들이 지켜주기까지 했다. 그 가게가 평소에 흑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얘기가 전해지면서 한인들은 흑인들이 그토록 분노한 이유를 성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흑인들에게 한인들은 백인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며 자신들에 대한 편견을 가진 집단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그 후 한인과 흑인들 사이의 대화,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이벤트들이 전개됐다.

LA 흑인폭동, 그리고 15년 뒤 지금

소니야 장.
소니야 장. ⓒ 하승창
이같은 모임 또는 행사는 15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 잦아들었지만, 아직까지 그 명맥을 잇는 사람이 있다. 소니야 장. 미 이민국에서 한인들을 위해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소니야 장이 미국에 온 지는 40여년이 흘렀다고 한다. 유학왔다가 미국인과 결혼하면서 미국에 남은 그는 14년째 홀로 이 일을 해 오고 있다.

그는 93년 초에 한흑연대기구(OAKS, Organization for African-American/Korian-American Solidarity)를 만들었다. 이사진은 한인 3명과 흑인 6명. 상근자는 없다. 그 혼자 실무를 담당해온 것이다. 이사장은 Wyatt Tee Walker 목사로 60년대 흑인민권운동 시절 마틴루터킹과 함께 하던 사람이다.

소니야 장이 한인과 흑인의 갈등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LA폭동 이전부터다. 1980년대 후반으로 기억하는데 한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을 보여줬던 '빨간 사과*(red apple)'사건. 그 사건에서 한인이 교훈을 얻었다면 LA폭동에서 한인들이 그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소니야 장의 생각이다.

사건은 뉴욕 브루클린 지역의 한인 가게에서 벌어졌다. 당시 한인 가게 주인과 흑인 손님은 절도 여부를 놓고 실강이를 벌였다고 한다.

흑인 손님은 실랑이 과정에서 가게 주인이 자신을 밀쳐서 부상을 입었다면서 주인을 고소했다. 그는 주인에게 계속 배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흑인들이 6개월여에 걸쳐 매일 가게 앞에서 배상과 치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위기의식과 동료의식을 느낀 주변의 한인가게들도 "한 가게가 무너지면 다른 가게도 똑같이 당하게 된다"고 생각해 아무도 찾지 않는 한인 가게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결국 한 가게의 사건이 전체 흑인과 한인간의 갈등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던 소니야 장은 미국사회에서는 똑같이 마이너리티일 수 있는 한인과 흑인들이 화합해서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직접 현장에 찾아가 시위대인 흑인들과 대화를 해보았다고 한다. 흑인들의 한결같은 답변은 '한인들이 우리와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 한인가게는 문을 닫고 말았다. 소니야 장은 이 작지 않은 사건에서 한인이 교훈을 얻었다면 몇 년후 LA폭동에서의 한인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소니야 장도 꿈이 있습니다

LA 코리아타운에서 한 한국인이 흑인폭동으로 잿더미가 된 가게를 정리하고 있다. 1992년 5월 2일 모습.
LA 코리아타운에서 한 한국인이 흑인폭동으로 잿더미가 된 가게를 정리하고 있다. 1992년 5월 2일 모습. ⓒ 연합뉴스
두 번의 사건을 목도한 소니야 장은 차별받는 마이너리티들인 한인과 흑인의 화해를 위해 일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남편을 비롯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비영리단체인 한흑연대기구를 만들었다.

소니야 장이 미국 생활을 막 시작할 즈음 흑인민권운동의 시위에 참여한 경험도 작용했다. 당시 마틴 루터 킹의 호소에 귀기울이며 모든 '차별'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고, 킹목사가 유명한 연설문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Dream)"에서 말했듯이 결국 미래엔 화해하고 화합하지 않으면 갈등을 해소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소니야 장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대화모임이었다. 그러나 대화모임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고민 끝에 '문화적 접근'을 시도했다. 한인문화와 흑인문화를 함께 누릴 방안을 찾은 것이다.

현재도 진행하고 있는 '문화 교류(culture exchange)'가 그것이다. 흑인들이 즐기지만 한인들도 좋아하는 가스펠 음악제. 무용제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시연한 데 이어 앞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한인들이 흑인들을 위해 매년 10여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사업은 초창기 참여하던 여러 한인 관련 단체들이 아예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건 사업으로 확대됐다고 한다.

대화모임 역시 더디지만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히스패닉과의 갈등도 많아져서 그들과의 관계를 넓혀 나가고 있다. 또 매년 연말이면 흑인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모아 나누어 주는 행사도 지속하고 있다.

"지쳤다... 하지만 더 가야한다"

지난 3월 미국 거주 한인들이 다른 소수인종 시민들과 함께 워싱턴 미국의회 앞에서 "미국 이민법의 악법적 요소 때문에 고통받는 한인들이 적지 않다"며 이민법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거주 한인들이 다른 소수인종 시민들과 함께 워싱턴 미국의회 앞에서 "미국 이민법의 악법적 요소 때문에 고통받는 한인들이 적지 않다"며 이민법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이 모든 일을 소니야 장 혼자의 힘으로 일구어 왔다. 그는 매년 한 번씩 모금행사를 하지만 턱도 없이 부족하고, 결국 그는 적지 않은 사재를 털어야 했다.

흑인들이 1900년대 초창기 흑인민권운동 당시에 결성해서 지금은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NAACP(National Association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처럼 영향력있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니야 장도 요즘은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그는 "너무 큰 꿈을 꾸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단체는 아직 홈페이지조차 없다.

하지만 소니야 장의 열정은 식은 것 같지 않다. 내년에는 언어교육을 매개로 지적으로 훌륭한 흑인들과 한인들을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실천에 옮겨 볼 생각이란다. 아프리카도 반드시 방문하겠다고 한다. 올해 한국을 다녀온 흑인친구들이 너무 좋아하고 한인사회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은 주류가 아니다. 결국 마이너리티인 한인이 마이너리티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국사회에서 한인도, 흑인도 함께 잘 살아가기 힘들다는 성찰이 소니야 장을 지금껏 이끌어 온 셈이다.

지난 14년간 소박하게 활동하고 만들어 온 소니야 장의 의욕과 의지가 꺽이지 않고 지속되어 한인과 흑인들의 상호 이해가 넓어지는 계기가 오길 바란다. 또 이를 기초로 미국 사회에서 인종을 넘어선 마이너리티들의 연대가 굳건해져서 차별을 해소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