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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왕망전. 왕망은 존칭 없이 '왕망' 혹은 '망'이라고만 불리고 있다.
<한서> 왕망전. 왕망은 존칭 없이 '왕망' 혹은 '망'이라고만 불리고 있다. ⓒ 중화민국(대만) 중앙연구원 25사 D/B
그러나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군주 중에서 실질적으로 찬탈을 거치지 않은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득권 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면, 기득권 층의 눈에는 대개 경솔한 인물로 보이기 마련이다. 또 중국 역사서에서는 왕망이 어딘가 부적격자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만, 그는 귀족 출신인데다가 2번이나 섭정을 지냈을 정도로 경험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왕망에 관한 부정적 평가는 대개 공정한 평가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역사책에서 왕망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건 간에, 그는 엄연히 15년간 중국 대륙을 다스린 통치자였다. 그럼, 그는 왜 중국사에서 그런 천대를 받고 있는 걸까?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왕망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통치는 어떠하였는지 하는 점 등을 살펴보자.

왕망은 전한 11대 군주인 원제(元帝)의 처조카였다. 원제의 비(妃)인 왕씨가 왕망의 고모였던 것이다.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지체 높은 가문의 지원 덕분에 기원전 16년에 귀족 작위를 받았고 기원전 8년에는 전한 12대 군주인 성제(成帝)의 섭정이 되었다. 성제 사망 후인 13대 애제(哀帝) 시기에는 재야로 밀려났으나, 14대 평제(平帝) 때에 다시 섭정에 올랐다.

평제 사후에는 두 살짜리 어린아이인 영을 황제로 등극시킨 뒤에 자신이 국정 전반을 장악하였다(기원후 6년). 그리고 기원후 8년에는 신나라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집권 15년만인 기원 후 23년에 농민반란에 의해 왕망 자신도 피살되고 신나라도 붕괴하고 만다.

왕망이 통치한 시기에 중국이 처한 핵심적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이 시기에 내부적으로는 지방 호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주변 이민족들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왕망이 이 중에서 국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하는 점만 살펴보기로 한다.

왕망의 화폐개혁 때에 나온 '왕망폐'.
왕망의 화폐개혁 때에 나온 '왕망폐'.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대만판
내부적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왕망이 채택한 정책은 이른 바 왕전제(王田制)라는 것이었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 따르면, 왕망이 내린 조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지금 천하의 땅을 왕전이라고 고쳐 부르고 노비는 사속(私屬)이라 하여 매매할 수 없도록 한다. 남자 식구가 8명이 되지 않는 집에서 1정(井, 약 900무)이 넘는 땅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그 초과분을 구족(九族)과 향당(鄕黨)에게 주도록 하라."

이에 따르면, 남자 식구 8인 미만의 가정에서 900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토지 소유의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그리고 토지가 없는 가정에 대해서는 국가가 토지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왕전제는 호족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함으로써 소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왕망의 정책 가운데에 핵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왕전제의 시행은, 왕망이 당대의 시대적 과제에 깨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직접 실천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을 통해, 왕망이 경제적 측면에서 일반 민중의 편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시대적 과제인 대토지 소유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는 적어도 역사적으로는 칭찬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럼, 그가 그토록 역사적 과제에 충실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냉대를 받는 것도 모자라 그가 세운 신나라마저 정식 왕조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점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5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왕망은 기득권 층을 자극하기만 했을 뿐 그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의 왕전제는 대토지 소유를 추구하는 기득권 층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정책은 기득권 층과 대결을 거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기득권 층을 공략하기 위한 실제적 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적인 목표를 설정해 놓고서는, 그저 개혁적인 수단을 취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기득권 층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과거 청산에 나서기보다는 법률 개정 등의 소극적인 방법에 머물고 말았던 것이다. '개혁'의 방법으로 '혁명'의 목표를 이루려 했으니, 제대로 성공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기득권 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기에 기득권 층의 반격을 초래했고, 또 그러는 사이에 사회 전체가 혼란해져서 농민층의 반란까지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득권 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엉뚱하게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생각했던 농민층의 반란으로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다.

둘째, 왕망은 정책 목표를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정책 수단(공권력이나 물질적 자원 등)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가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목표 수행에 필요한 현실적 수단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서> 식화지에 의하면, 왕망은 개혁정책이 반발에 직면하자 정책을 자주 수정하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국가 공권력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훌륭한 뜻을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아무런 수단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훌륭한 뜻을 성취하려 하는 것은 자칫 국민들에게 고생만 안겨 줄 수도 있다. 정책 수단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정책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주머니에 돈도 없이 사람들을 고급 식당에 데려가는 것과 같은 무책임한 행동일 것이다.

셋째, 왕망은 지식인층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 기득권 층을 꺾지 못한 것이 권력을 상실한 일차적 원인이라면, 지식인층의 마음을 사지 못한 것이 역사책에서 천대를 받는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망은 섭정 시절에 박사(博士) 정원을 증가시킨 일이 있다. 이는 지식인들에게 더 많은 자리를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지식인들을 국가의 주요 포스트에 앉히는 데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에는 구 지식인들이 그의 사후에 그를 마음대로 평가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조선 전기의 조광조가 사후에 지식인들에 의해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자신의 생전에 자파 지식인들을 사회 전면으로 이끌어 올리는 데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망은 조광조보다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고도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다.

넷째, 왕망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후대의 지식인들이 아무리 왕망을 폄하한다 해도, 왕망의 후손들이 그대로 권력을 장악했다면 왕망이 지금처럼 역사 속에서 천대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망은 당대에 자신의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후에 자신을 옹호해 줄 정치 권력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태종이나 세조가 인륜도덕을 어기고도 사후에 격하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손들에게 권력이 무사히 넘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망에게는 그를 옹호해 줄 강력한 후계자들이 없었다.

다섯째, 왕망의 정치는 민중이 이해하기 힘든 정치였다. <한서>를 보면, 왕망의 정치가 상당히 복잡했다는 평가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그가 이상적인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복잡한 정책이나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정치는 바람직한 정치인 동시에 '너무 어려운 정치'였던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정책이더라도 그것이 너무 복잡하면 일반 민중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민중이 그 정책을 지지할 수 없게 된다. 왕망 정권이 소농민의 생활기반 확보에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농민반란에 의해 붕괴된 점을 보면, 왕망이 자신의 정책을 농민층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기득권 층은 자신들의 권익을 침해하기 때문에 반대하고, 일반 민중은 너무 복잡해서 반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위와 같은 왕망의 사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가?

하나는, 지도자를 평가할 때에 기득권 층의 논리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왕망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기득권 층에서 찬탈자라느니 경솔하다느니 자격이 없다느니 하는 비판을 받는 사람이 오히려 시대적 과제와 민중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지도자를 평가할 때에 그가 내세우는 비전보다는 그가 과연 그 비전을 수행할 만한 역량이 있는가를 우선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념이나 비전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성취할 만한 역량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공연히 민중을 고생길로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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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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