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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공원에서 바라본 정동진 전경
조각공원에서 바라본 정동진 전경 ⓒ 김대갑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의 몸짓, 대사, 패션이 현실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드라마를 찍은 장소는 관광명소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마디로 드라마와 영화가 현실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약간 비정상적이다. 그 비정상적인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드라마가 바로 한적한 어촌 정동진을 일약 전국적인 관광지로 만들어버린 <모래시계>였다.

정동진역
정동진역 ⓒ 김대갑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파도와 가까운 절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해동 용궁사라는 절이다. 바다의 동쪽에 있는 용의 궁전과 같은 절이란다.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에 가면 세계에서 파도와 가장 가까운 철도역이 하나 있다. 왕이 있는 경복궁의 정동 쪽에 있다고 해서 정동진이라고 이름 붙여진 마을에 고즈넉하게 서 있는 간이역, 정동진역.

정동진리와 정동진역만큼 드라마의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은 드물 것이다. 정동진역은 동해남부선의 간이역인데, 열차이용객의 감소로 말미암아 1996년에 폐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95년에 방영되기 시작한 <모래시계>는 이 폐쇄 직전의 정동진역을 2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로 만들어버렸다.

지금 정동진은 전국 최대의 해돋이 명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작 정동진의 일출은 별로 볼 것이 없다. 동해의 여느 일출 장소와 비교해서 그리 뛰어난 전경이 있는 곳은 아니다. 오히려 동해의 일출 명소는 추암해수욕장이나 호미곶, 영덕, 간절곶 등이라고 할 수 있다.

12억원어치 모래.
12억원어치 모래. ⓒ 김대갑
이유야 어찌되었든 정동진은 이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의 하나가 되었다. 12억원을 들인 세계 최대의 모래시계가 설치되어 있다.

또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해상크루즈호텔이 하얀 빛을 정동진 해변의 모래사장에 투영시키고 있다. 해상크루즈 호텔 주변에는 예술적인 S라인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조각품들이 아름드리 자태를 드리운다.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고대 범선 속에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축음기들이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고고하게 앉아 있다.

그리고 주말 저녁이 되면 경향 각지에서 몰려온 아베크족들로 정동진은 불야성을 이룬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동진이 전국적인 관광명소라는 것을 시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래시계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8세기경 프랑스 사르트르의 사제인 리위트프랑이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부터 사용된 흔적이 있기도 하다. 정해진 일을 일정시간에 한정 짓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모래시계는 교회설교용으로 많이 애용되었다고 한다. 모래시계는 주어진 시간에 일을 마쳐야 하는 당위성을 묵계로써 보여주는 장치였던 것이다.

정동진 해변
정동진 해변 ⓒ 김대갑
송지나와 김종학이 창조해낸 <모래시계>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는 입체적인 드라마였다. 흘러내리는 모래는 세 주인공의 현실을 시시각각 보여주었고, 상부의 모래는 그들이 장차 닥칠 미래의 어느 순간이었다. 그리고 하부의 모래는 이미 지나가고 만 그들의 과거였다.

<모래시계>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드라마로 보면 된다. 비록 이 드라마가 5.18 광주를 하나의 양념처럼 등장시키고, 당시 학생운동을 흘러가는 옛 시절의 흔적으로만 보여주었지만 말이다.

또 조직 폭력배를 홍콩 느와르 식으로 천박하게 포장하여 폭력을 아름답게 보이는 우를 범했지만 말이다. 김영삼 정부 시대에 교묘하게 방영하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말이다.

옥빛 바다
옥빛 바다 ⓒ 김대갑
정동진은 그냥 정동진이었으면 좋았다. 에메랄드빛으로 뭉쳐진 바다를 생의 터전으로 삼아 조각배처럼 살아가던 어민들의 투박한 모습이 있었던 정동진이 좋았다. 동해안의 지형변화를 잘 알려주는 해안단구가 아찔하게 서 있던 정동진이었으면 좋았다. 파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금기 어린 비바람을 참고 견디던 해송이 서 있던 정동진역이었으면 좋았다. 말라비틀어진 고현정 소나무 대신에.

요염한 여인상
요염한 여인상 ⓒ 김대갑
조각공원에서 바라본 정동진의 바다색은 아주 아름다운 옥빛이었다. 하늘의 코발트 빛과 모래사장의 은은한 기운, 희미한 향을 풍기며 살금살금 불어오는 바람이 한데 어우러져 고운 옥빛 바다를 빚어낸 것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 드라마 하나를 핑계 삼아 각종 유흥시설과 인위적인 장치, 조잡한 관광 상품이 판을 치는 모습을 보니 입맛만 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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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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