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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를 잡아 가두느냐
누가 나의 날개를 꺾느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해꼬지라도 하더냐
나를 철망 밖으로 풀어다오
나도 너처럼 자유를 누리고 싶다
시뻘건 불구덕 위에서 타들어가는 나의 꿈
너희들이 나를 먹는다고 하늘을 날 수 있겠느냐
- 이소리, '청둥오리 농장에서' 모두
동양화에 나오는 청둥오리는 장원급제를 뜻하는 길조
나, 청둥오리. 나는 기원전 2~3천년 앞부터 사람들의 사냥감이 되어온 자연의 물오리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너무나 자유스럽게 돌아다니는 나를 잡아 집오리로 처음 키우기 시작한 것은 고대 로마시대 바로 황제(Varro, BC110∼27년) 때가 처음이다. 그리고 지구촌의 사람들이 나를 떼지어 키우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뒤부터다.
한반도에서는 내가 언제부터 집오리로 키워지기 시작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신라 고도 경주에 있는 안압지(雁鴨池)가 기러기 '안'(雁)에 오리 '압'(鴨)자를 썼고, 압록강(鴨綠江)의 '압'(鴨)자와 푸를 '록'(綠) 역시 푸른 오리, 즉 청둥오리란 뜻이 있는 걸 보면 한반도에서도 나를 집오리로 키운 지 꽤 오래 되었지 않겠는가.
나, 청둥오리의 이름은 한자말로 오리 '부'(鳧), 기러기 '압'(鴨), 집오리 '목'(鶩)이다. 조선 선조 때 송강 정철이 쓴 <송강별곡>에는 내 이름이 '올히'라고 씌어져 있다.
동양화에 나오는 나는 장원급제를 뜻한다. 왜? 오리 '압'(鴨)자를 풀어보면 장원급제를 뜻하는 '갑'(甲)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드나무 밑에 내가 두 마리 그려져 있는 동양화는 버들 '류'(柳)자를 머물 '류'(留)자로 읽어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행운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라는 그림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가장 흔한 겨울철새 '청둥오리'
나, 청둥오리는 한반도에서 가장 흔한 겨울철새다. 내 몸의 길이는 약 60cm(수컷)~52cm(암컷)이고, 수컷이 갈색으로 얼룩진 암컷보다 훨씬 더 멋지다. 수컷은 머리와 목에 짙은 녹빛의 윤기가 아름다우며, 흰색의 가는 목테까지 있다. 그리고 나의 꽁지깃은 흰빛이지만 가운데 꽁지깃은 검정빛이며 부리는 노랗다.
나는 연못이나 논, 냇가, 바닷가 등지에서 겨울을 난다. 나의 특징은 낮에는 연못이나 냇가 등 앞이 확 트인 곳에서 먹이를 찾지만 저녁 어스름이 지기 시작하면 논이나 습지로 옮겨 잠을 잔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동무들과 떼 지어 하늘로 날아올라 V자 모양을 그리며 다시 연못이나 냇가 등으로 찾아가 먹이사냥에 나선다.
나는 4월 끝자락에서부터 7월 초까지 물가의 숲에 둥지를 틀어 6∼12개의 알을 낳아 28∼29일 동안 알을 품어 새끼를 친다. 물론 알을 품어 새끼를 기르는 것은 암컷의 몫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풀씨와 나무열매, 물고기다. 하지만 가끔 곤충류와 지렁이 등 무척추동물 등도 간식으로 즐긴다.
나는 북위 30∼70° 사이의 북반구에서 주로 살며 날씨가 몹시 추워지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내려와 겨울을 보낸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집오리로 길들여진 내 이종사촌들은 계절에 관계 없이 한 곳에서 주인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살아간다. 또한 지금 사람들에게 길들여지고 있는 내 동무들도 머지 않아 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고혈압, 중풍, 음주 전후에 특히 좋은 청둥오리고기
나, 청둥오리는 닭에 비해 살코기가 질기고 비린내가 많이 난다. 그리고 닭보다 뼈와 기름이 아주 많아 사람들이 먹기에 조금 불편하다. 오죽했으면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는 옛 속담까지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제사상이나 결혼식 잔칫상에 오르지 못한다. '오리고기를 잘못 먹으면 손가락이 붙는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영양가가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즐기는 고기류 중에서는 쉬이 찾기 힘든 알칼리성 식품이다. 그 때문에 동맥경화나 고혈압 같은 성인병이 있는 사람들이 나를 자주 먹으면 금세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또한 이 때문에 요즈음 나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의 체내에 축적되지 않는 불포화 지방산도 다른 음식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필수 아미노산과 여러 가지 비타민도 아주 많다. 내 몸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은 쌀밥의 6배나 되며, 콩의 1.4배이다. 비타민 또한 닭의 3.35배나 된다. 게다가 광물질인 칼슘과 인, 철, 칼륨도 듬뿍 들어 있다.
나는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에도 나온다. <동의보감>에는 내가 "고혈압과 중풍, 신경통, 동맥경화 등 순환기 질환에 특효가 있다"고 씌어져 있다. <본초강목>에는 내가 "비만증과 허약체질, 병후 회복, 음주 전후, 정력 증강, 위장 질환 등에 효험이 있으며, 사람 몸 안의 해독작용과 혈액순환을 돕는다"고 되어 있다.
쫄깃쫄깃하면서도 고소하게 감도는 깔끔한 뒷맛 일품
올해 초, 나는 사람들에게 철새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주남저수지로 가는 들머리에 있는 어느 식당으로 팔려왔다. 주남저수지는 내 할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해마다 겨울철만 되면 날아와 머물던 곳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내 할아버지가 사람들이 쳐놓은 그물에 그만 걸려들게 되면서 내 할아버지는 마치 집오리처럼 길러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문에 내 부모님과 나도 김해에 있는 어느 농장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때 나는 가끔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간혹 날개를 펴들고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보기도 했지만 튼튼한 철망이 가로 막고 있어 한번도 농장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다.
지난 6일(토) 오후 1시. 나는 비좁은 철망 안에서 주남저수지를 바라보며 놀다가 순식간에 손님들의 소금구이(2만5천원)가 되었다. 그날, 손님들은 참숯불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노르스름하게 구워지고 있는 내 몸을 집어 들깨가루와 참기름에 포옥 찍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기꺼이 내 한 몸을 바쳐 그 손님들의 입맛과 건강을 챙겨주는 음식이 되었다.
손님들은 참숯불에 잘 구워진 내 살코기가 쫄깃쫄깃한데다 고소하면서도 뒷맛이 참 깔끔하다 했다. 집오리 고기와는 맛이 전혀 딴 판이라고 했다. 나는 상추와 부추무침에 쌓여 손님들의 입속에 들어가면서도 기분이 흐뭇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제2의 고향에서 사람들의 맛난 음식이 되었으니, 이제 나는 사람의 몸이 되어 주남저수지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 하나 죽어 더 많은 '나'를 지키리라
나, 농장에서 자라는 청둥오리. 내 비록 하늘을 훨훨 날지 못하고 사람들 손에 의해 길러지면서 사람의 맛난 음식이 되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지만 나는 행복하다. 내 한 몸 기꺼이 사람에게 바침으로써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내 형제들이 저리도 자유스럽게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며 주남저수지를 오갈 수 있지 않은가.
그래. 나 하나 희생함으로써 더 많은 '나'가 저리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무서울 게 뭐가 있겠는가. 올 겨울, 나를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내게로 오라. 내가 사람들의 입맛과 건강을 지켜주는 새 생명의 빛이 되리라. 그리하여 나 잡아먹고 닭발 내미는 그런 사람이 영원히 사라지게 하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미디어 다음>에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