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헌화로의 절벽
헌화로의 절벽 ⓒ 김대갑
강릉시 정동진에서 심곡 마을을 거쳐 해안가를 따라 차를 몰고 가면, 오른 쪽의 기암절벽과 왼쪽의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는 해안도로가 하나 나타난다. 이 도로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금진항이 나타나는데, 절벽에 핀 쑥부쟁이와 들국화, 철쭉꽃이 아슬아슬한 자태로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한다. 마치 천 삼 백 년 전에 절벽 위에 핀 꽃을 꺾어 바칠 남자를 고혹적인 시선으로 기다리던 수로부인처럼.

성덕왕대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던 길이었다. 순정공 일행은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해안가에 자리를 펴고 향긋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팜므파탈의 미모를 지닌 순정공의 부인께서 뭇 남성들을 시험하는 도발적인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칼처럼 뾰족한 절벽 위에 핀 꽃-철쭉꽃으로 추정-을 자기에게 꺾어 바칠 사람이 없냐며 아리따운 눈을 슬며시 내리깐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세미녀의 유혹이라 해도 목숨을 내걸고서 절벽 위로 올라갈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수로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실망어린 표정을 날렸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보건대 수로부인은 대단한 공주병 환자였던 것 같다.

아름다운 해안도로
아름다운 해안도로 ⓒ 김대갑
그런데 희한하게도 공주병 환자에게는 그를 떠받드는 머슴이 꼭 한 명 있다. 살로메의 치명적인 춤에 넘어가 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왕이나 서시의 요염한 자태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한 오나라 왕 부차처럼 말이다. 수로부인이 헛웃음을 날리며 동해의 옥색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던 중에 태권브이처럼 등장한 한 노옹이 있었다.

노인은 손에 임신한 암소를 끌고 있었는데, 수로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주저 없이 절벽 위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는 붉은 철쭉꽃을 한 아름 따서 그녀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노래도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진댄/제 꽃 꺾어 바치오리다.


노인은 <헌화가>라는 이 노래를 부른 후, 한숨도 미련없이 수로부인 곁을 떠났다. 요즘말로 하면 진짜 '쿨'한 사람인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바치는 행위는 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다는 의사표시이다. 꽃은 처녀를 상징하는 것이며 꽃을 꺾는 행위는 처녀성을 정복하고 싶다는 심리적 표현이다. 결국 헌화가를 부른 노인은 수로부인에게 강한 성적 메시지를 전달한 후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경국지색인 그녀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말이다.

수로부인은 처용의 아내와 같은 영광(?)을 대단히 많이 겪은 미인이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역신과 용, 괴물들이 주야로 나타나 그녀를 납치하곤 했으니 말이다. 순정공 일행이 다시 움직여서 어느 바닷가에 당도했는데, 갑자기 사나운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물고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일행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역시 한 노인이 나타나 여러 입으로 떠들자고 선동하였단다. 백성들을 불러 모아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서 항의의 노래를 부르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집회 및 시위를 감행하면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 내 놓아라'라고 협박하였고 마침내 용이 수로부인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거북이는 수로부인의 미모를 탐하는 남성의 성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삼국유사 수로부인조의 헌화가는 성적인 상징과 암시가 곳곳에 배어 있는 노래였던 것이다.

해안의 기암괴석
해안의 기암괴석 ⓒ 김대갑
선문대 국어국문학과 구사회 교수는 '자줏빛 바위 가에'의 원문인 자포암호(慈布岩乎)를 재미있게 해석했다. 자포는 자색이 아니라 '자지'로 구개음화가 이루어지는 '자디'라는 것이다. 즉, 자포암은 '발기했을 때의 검붉은 색을 띠는 남성기'를 표현한 것이며 헌화가는 남근석을 숭배하는 노래라는 것이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인 남근숭배사상이 헌화가에 깔려 있으며 절벽 위의 꽃은 생명의 잉태를 가져다주는 주술적 상관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노옹이 손에 잡고 있는 암소는 생명력을 수태할 수 있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혹자는 수로부인이 샤먼이라고 까지 주장했다. 수로부인이 용궁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샤머니즘적인 제의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헌화가는 파고들수록 다양하면서도 재미있게 해석될 수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심곡리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깊은 계곡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깊기에 6·25까지 몰랐다는 말이 전해져 오겠는가. 산으로 첩첩히 둘러싸여 있고, 바다로 막혀 있었으니 오지 중의 오지였던 셈이다. 하긴 이런 오지였으니 수로부인에 얽힌 전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이다.

정동진의 옥색바다와 수로부인의 치명적인 유혹이 나풀대는 해풍처럼 물결치는 곳. 그 해풍을 맞아 움푹 팬 양 볼을 보여주는 바위가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던 곳. 쿨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가 나부끼는 헌화로를 달려보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