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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예기치 않는 사고들을 당하게 된다. 그동안 장애우들을 무심코 바라보던 눈길에 촉촉한 이슬이 맺히고 만다. 그런 시련 뒤에야 모두가 예비 장애자라는 것을, 나와 우리 가족, 친구와 이웃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2005년 4월의 기억이 함께 달리고 있다. 장애우들에게 무관심했던 참회도 동행을 했다. 남의 염병보다 내 고뿔이 더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종순이가 교통사고 났단 말이다. 여수에서 가망이 없다고 해서 지금 전대병원으로 후송되었어. 어떡하냐! 어떡하냐! 목뼈가 다쳤는데 여기서는 가망이 없다는데, 어떤 동생인데 어쩌면 좋다냐. 자꾸 신부님한테 연락하라고만 헌디 어쩌냐."
수화기에서 다급하게 쏟아지던 큰 누나의 닭똥 같은 눈물, 20개월이 흘렀지만 그 눈물은 마르지 않고 있다.
'착한 누님 살려주세요.' 기도도 아직은 간절하다. 고3인 딸은 대학교 1학년이 되었고 중3인 아들은 고1이 되었다. 고통 중에도 세월은 흐르고 인생은 성숙하는 것일까?
목뼈 4번 디스크가 꺾이면서 척수(뇌에서 척추로 연결된 신경다발)가 손상되어 목 아래로 사지가 마비되었던 누나. 손상된 척수가 너무 많이 부을 경우 호흡을 관장하는 신경을 눌러 쇼크로 죽을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 사지가 마비되거나 다리나 팔이 마비되는 경우, 다치기 전의 60~70%까지 회복되는 기적 같은 경우.
누나는 최악의 상황만 벗어났을 뿐이다. 20개월의 세월이 흘렀지만 팔목까지만 신경이 돌아왔다. 아직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보호자가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 팔목에 고무줄로 묶어 낀 숟가락에 밥과 반찬을 올려 주면 겨우 입으로 넣을 수 있을 뿐이다.
함께 병문안 가기로 한 아버님과 누님 같은 두 분이 강남터미널로 마중을 나왔다. 신정연휴를 앞두고 붐비는 사람들 속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가방과 보따리가 그림자처럼 따라 간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다.
전철을 갈아타고 장위동으로 간다. 가방과 보따리를 나란히 두 사람씩 들고 병원 문으로 들어섰다. 재활전문병원 복도에는 휠체어로 이동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병실에 없는 누나를 찾아 작업치료실로 갔다. 허리에 안전벨트를 하고 바로 서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누나! 매형! 저예요."
"어, 왔구나. 대모님도 오셨네!"
이 핑계 저 핑계로 2개월이 넘도록 병문안을 가지 못했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휠체어에 탄 누나의 손을 잡고 치료실을 나오자 체중계에 오른다. 날씨가 춥다고 입은 두꺼운 내복 때문에 체중이 늘었다며 매형과 누나가 웃는다.
10인실 병실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증세는 가장 심한 누나. 휠체어에 앉은 누나를 둘러싸고 안부가 오간다. 햇살에 빛나는 누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환하게 웃는 누나의 힘없는 두 손에 작은 액자가 안긴다.
"이번에 노동운동가들의 세계대회 차 스페인에 다녀왔는데, 어느 농부가 성당에 조각한 십자가상인데 웃고 있는 예수님이에요. 웃으며 투병 잘 하라고요."
손가락까지 신경이 살아나지 않아 액자를 잡고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다음은 대모님이 쪄온 약밥이 보따리를 풀고 올라왔다. 국화꽃과 안개꽃이 약밥 위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달맞이꽃이 신경회복에 좋다는 뉴스를 보고 깨끗한 들에 가서 씨를 받았어요. 그 씨앗이 얼마나 작던지, 채송화씨 같아요. 거뭇거뭇한 것이 달맞이 씨앗이에요. 집안일과 기도를 마치고 밤새 약밥을 만들었어요. 여기에 온다고 생각하니 피곤하지도 않더라고요."
"이 작은 씨앗을 받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대요. 또 밤새 약밥을 만드셨다니 정말 지극한 정성입니다."
"대모님 정성이니까 저녁 식사 전에 한 입만 먹어봐요."(매형이 한 술 떠서 누나 입에 넣어 준다.)
"정말 달맞이 씨앗이 참깨처럼 씹히네요."
"투병생활 잘 하다가도 가끔 짜증이 날 때가 있어요. 순천에 있을 때 간병인에게 '언니야 오늘은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나도 나를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고 조금 있으면 대모님이 병실로 들어오는 거예요."
"텔레파시가 통하는가 봐요. 저도 그런 날에는 아침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불안해요. 병원에 가면 만날 수 있으니 전화도 안 하고 그동안 미리 준비해 놓은 것들을 싸들고 기차 타고 와요."
"대모님만 왔다 가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사랑은 이처럼 불안함까지도 감지하는 초능력인가 봐요?"
다음은 고향 오수에서 과수원 하는 자매님이 오랜지쥬스병에 직접 만들어 선물한 홍도와 백도가 가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쌀과 검은콩 강정이 나오고 멸치와 더덕조림도 나왔다.
끝으로 책보에서 오래 기다린 곶감 상자도 올라왔다. 새참 광주리를 이고 논길을 걸어가는 엄마와 딸의 그림엽서 아래 곶감이 다정하게 앉아 있다.
"이것은 신부님이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깎아서 베란다에 말린 곶감이에요. 주먹만한 감 150개가 베란다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맛도 또한 꿀맛이에요."
병실만큼 동병상련의 장소가 또 있을까, 매형이 달맞이 꽃씨로 만든 약밥 그릇을 들고 병실 모든 환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조금만 주세요."
"저기 한 통 또 있어요. 공짜는 많이 받고 보는 거예요."
"신부님도 내려 가셔야 하고 저희들도 모임이 있으니까 신부님 기도하시지요."
"전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 잘 못해요. 누님이 하세요."
20개월 동안 투병 중인 작은 누나가 다시 일어나 가족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기도는 했는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눈치 챈 앞자리 환자가 말문을 연다.
"저 검은 옷을 입은 분은 동생 같은데 참 맑아 보이네요. 혹시…."
"예, 신부님이십니다. 시인이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춥니다. 가끔 평택 대추리 촛불 집회에서 노래를 하시면 주민들이 깜빡 죽습니다."
"그럼 노래 한 자리 하시고 가서야지요."
"다른 환자분들도 원하신다면 한 곡 하지요."
"박수를 치셔야 명카수의 노래를 듣지요."
"박수! 짝! 짝! 짝!"
"김수희 노래를 잘 하는데 혹시 듣고 싶은 노래 있으면 말씀하세요."
"애모요!"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에 강 너머 우리 사랑은…."
"앵콜! 앵콜!"
"그럼 '너무합니다'를 여자 키로 불러보겠습니다. 2절은 개사를 해서 부르고요."
"마지막 한 마디 그 말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마지막 한 마디 그 말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다시 일어날 겁니다. 힘과 용기를 잃지 마시고 열심히 투병하세요. 사랑합니다. 용기내세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아니 왜 환자들을 울립니까?"
"사랑은 눈물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