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광해군이 정식 임금이 아니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광해군 즉위년(1608년) 2월 2일에 광해군은 군주로 정식 즉위하였다.
위와 같이 광해군은 조선의 정식 군주였지만, 인조 쿠데타(1623년) 이후에 사후 격하되었을 뿐이다.
광해군만 중립외교를 한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광해군을 중립외교의 대명사처럼 인식하고 있다. 광해군이 실질적으로는 친후금 외교, 형식적으로는 친명 외교를 함으로써 사실상의 중립외교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광해군을 중립외교의 대명사로 인식하다 보니, 실제로 광해군보다 중립외교를 더 잘했던 군주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 한 예가 고려 제6대 군주 성종(재위 981~997년) 시기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고려-북송-요나라의 3자 정립(鼎立)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성종 5년 즉 986년에 북송이 신생 요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고려에 협공을 제의한 일이 있다. 당초 파병계획을 세웠던 고려는 결국 거절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그로 인해 북송은 요나라 침략을 포기하고 방어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의 파병 거부는 북송의 침략 계획을 좌절시킬 만큼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려는 양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전략을 취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균형은 몽골 침략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탱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처럼 고려 초기의 군주들이 중립외교 혹은 균형외교에 더 능숙했는데도 현대 한국인들이 광해군만 '편애'하다 보니까 오늘날의 대한민국 외교와 관련하여 더 훌륭한 본보기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의 외교사(外交史)를 소홀히 다루는 데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조선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료(역사학 자료)가 적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고구려·고려보다는 신라·조선을 더 중시하는 일부 한국 학자들의 경향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광해군도 중립외교 혹은 균형외교를 한 게 사실이지만, 한국인들이 광해군에만 너무 집착하다 보면 광해군보다 더 훌륭한 사례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광해군만 실리주의자였을까?
'광해군은 실리를 추구했고 광해군의 정적들은 그저 명분만을 좇았다'고 하는 관념은 다소 협소한 인식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간에 국가의 외교는 대개 실리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개인 면에서도 매순간 실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명분을 강조하는 것이 실은 실리를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적나라한 실리 추구를 은폐하기 위해 그럴싸한 명분을 내놓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명분을 앞세워 친명 외교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실은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친명 외교를 실리외교라 인식했다. 명나라와 후금 중에서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 그들은 '그래도 안정적인' 명나라를 지지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리 대 명분의 구도로 광해군 시기의 대립 구도를 인식하는 것은 다소 협소한 태도가 될 수 있다. 광해군과 반대파 모두 실리를 추구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어느 쪽의 판단이 더 정확했는지는 이와는 별도의 문제다.
광해군은 왜 실패했을까?
이제 광해군이 권력을 빼앗긴 이유는 무엇인지, 그의 대외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광해군의 15년 통치를 살펴보면, 그가 쿠데타로 실각한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다. 그만큼 그가 열심히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시행한 민생안정책과 강병책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동법 실시를 통해 조세구조 일원화와 세금 부담 경감 ▲양전(量田) 실시를 통해 국가 재원 확보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대포 주조 등 국방력 강화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하는 등 초당파 정치 실시 ▲실리주의 판단에 근거한 파주 천도 계획 수립(결국 좌절).
광해군은 이처럼 재위 기간 동안에만 치적을 세운 게 아니라 재위 이전에도 큰 공로를 세운 바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분조(分朝, 미니 정부)를 이끌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위와 같이 광해군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戰後)에도 민생안정과 평화유지에 주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다.
쿠데타가 일어난 원인은 내치가 아니라 외치 즉 외교정책에 있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이유는 단순히 광해군이 후금 쪽을 편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친후금 정책에 2% 부족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부족'이라는 말은 광해군이 친후금 정책을 지탱할 만한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친후금 정책의 '단도리'를 잘하지 못한 것이다. 친후금이 불법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는 비밀 명령만 내린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이 사후에 범죄자로 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 광해군 자신이 친후금 정책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 친명보다는 친후금이 더 적절하다는 사회적 명분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를 당연히 수반했어야 했다. 그런데 광해군이 그런 노력을 벌였다는 특별한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조선의 기득권층이나 양반 유생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후금을 반대하라는 법은 없다. 유교적 정치이념이 지배했던 고려시대에도 한족의 북송이나 남송 대신 요나라·금나라 등과 손을 잡은 적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광해군이 사회의 여론 주도층을 설득하는 작업에 그리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친후금 정책이 실패함은 물론 결국엔 자기 자신도 권력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친후금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 명분을 개혁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조선시대의 정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전기에는 친명외교가 하나의 사회 명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전기에 사대주의가 특히 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성계 정권의 정통성이 그만큼 취약했기 때문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이성계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명나라의 지원을 통해 권력을 안정시키려 했다. 물론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국가의 자율성을 지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조선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중국에 의존하였다.
이처럼 친명외교가 하나의 사회적 명분으로 정착한 사회에서 친후금 정책으로 선회한다는 것은 일종의 대대적인 개혁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친명 정책에서 친후금 정책으로 전환하려면 정권의 명운을 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친후금 정책으로 선회하려면 국가의 명분 구조를 바꾸는 작업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친명을 합법시하고 친후금을 불법시하는 종래의 '공식'을 수정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국가의 명분이 친명에서 친후금으로 공식 변경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주 개인이 비밀리에 친후금으로 선회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정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왕명을 비밀리에 수행한 신하들도 잘못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군주 개인이 친후금으로 선회하고자 했다면, 공식적으로도 친후금을 사회적 명분으로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 작업 혹은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광해군은 가장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해군은 강홍립과의 독대에서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는 비밀 유지를 내렸다. 이 비밀 유지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제도 개혁이 수반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홍립이 역적으로 몰렸음은 물론이고 광해군 자신도 바로 그것 때문에 실각하고 말았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의 행위가 조선의 국법체계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 내용에 의하면 광해군 11년(1619년) 4월 2일에 비변사가 강홍립을 범죄자로 단죄하였다. 최고 국정기관인 비변사에서 광해군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강홍립을 단죄했다는 것은 광해군의 명령이 조선의 국법체계에서 '불법'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군주 자신이 국법체계를 위반했기 때문에 광해군 스스로 쿠데타의 명분을 내준 셈이 되었다.
강홍립이 대원수에 임명된 시점이 광해군 10년(1618) 4월 23일이고 인조 반정이 일어난 시점이 광해 15년(1623)인데, 1623년 시점에서 광해군이 친후금 외교 때문에 범죄자로 내몰렸다는 것은 1618~1623년 기간 동안 광해군이 사회적 명분을 친명에서 친후금으로 바꾸는 데에 필요한 작업을 특별히 시도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사회 명분을 바꾸기 위한 설득 작업이나 정치개혁을 특별히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주의 밀명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까지도 범죄자가 되고 그 명령을 내린 군주 자신도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명을 받아 친후금을 실시한다 해도 친명이 합법인 세상에서 그것은 '국가보안법'의 단죄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친후금이 불법으로 단죄 받지 않게 하려면 친후금을 합법화할 수 있는 제도개편과 정치개혁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광해군은 그것을 하지 못했거나 혹은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당시 상황에서는 그렇게 눈에 띄는 시도를 하기 힘들었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거나 혹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다면 처음부터 그것을 시도하지 않는 게 최고통치자의 자세다. 그리고 일단 친후금을 시도했다면 정권의 명운을 걸고서라도 사회 명분을 바꾸기 위한 도전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광해군은 정작 필요한 일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광해군의 친후금 정책은 그 대의에서는 타당했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데에 필요한 조치가 수반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도리'가 부족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회의 형식과 사회의 실질이 일치하지 않으면 사회 모순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 친후금이라는 실질을 형식으로 승화하려면 친명이라는 기존 사회 형식을 깨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양자를 무한정 공존시키면 언젠가는 모순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 광해군이 실패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위에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조가 이미 광해군 때에도 존재했다고 말한 바 있다. 광해군 때에도 여전히 친명 외교가 조선의 공식적 대외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은 언제라도 후금의 적이 될 수 있는 나라였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회 명분을 뒤흔드는 중대한 외교적 결정을 하면서 정작 그 명분을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광해군은 무책임한 군주였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의 판단은 옳았지만 그의 행동은 부족했다.
이 글은 결코 광해군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광해군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광해군이 왜 실패했는지를 냉정히 인식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대외정책을 수정하고 동맹의 대상을 바꾸려면, 기존의 동맹을 합법화하는 제도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제도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약 1주일 뒤의 제3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술을 살펴봅니다. '동아시아의 군주들' 시리즈와 별도로 일반 기사도 계속 발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