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매 학기초가 되면 가정환경조사서 써오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예전 조사서란에는 '전화기 유무' 'TV 유무' '부모님 학력' '재산 정도' 등의 항목들이 나열돼있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이런 조사서를 작성할라치면 여간 곤역이 아니었다. 왜 이런 일을 시키는지, 원….
여하튼 이러한 조사서의 많은 항목들이 지금은 필요없는 내용이 됐다. 예를 들어. 지금 전화기·TV 유무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물어보나마나니까. 전화기에서 '삐삐'로 휴대폰으로 그리고 DMB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화평론가인 폴 비릴리오는 현대사회를 '역사의 가속화와 공간의 축소화'로 설명하고 있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기억·흔적보다 미래·속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유산의 흔적을 보존해 유명해진 곳도 있다.
점점 빨라지는 현대사회, 그러나 흔적을 찾는 사람들
@BRI@1950년대 말부터 석탄수요가 줄어들면서 영국의 광산들은 하나둘씩 폐광되기 시작했다. 또한 산업화·도시화가 진전됨에 따라 자동차가 전차를 대체하고, 새로운 채굴기계가 발달하면서 광산의 기계가 수작업용 기구들을 대체했다.
영국의 빔미쉬 석탄박물관은 이러한 유산들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프랭크 애킨슨은 광산 램프부터 커다란 채굴기계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점의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집이 좁으면 빈터에, 이것도 모자라면 인근 군부대에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유산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박물관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몇몇 지방자치단체장과 협의를 하며 박물관 설립의 초석을 다졌다. 1958년 초기단계로서 9개 지방정부 합동위원회를 설립, 합의서에 따라 다양한 재정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해 말, 최초로 박물관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더럼 카운티 카운슬 박물관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박물관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실행계획을 세웠고, 각 지방정부의 의견을 조율하며 1966년 준비를 마쳤다.
이후 각 군별로 비서와 법률자문, 재정 및 회계담당, 박물관 계획자문 등을 두어 '카운티연합'으로 사업을 진행시켰다. 마침내 입지가 선정되고 더럼군에서 토지를 매입했다.이후 9개 지방정부 및 8개 기관이 합의서에 서명, 박물관 설립에 필요한 직원과 사무총장을 선임했고, 수집품들을 빔미쉬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프랭크 아킨슨은 <빔미쉬를 만든 사람들(1999)>이라는 책에서 지방정부의 지역이기주의를 더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각 지자체들은 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고, 더이상 지원을 할 수 없다고 위협하며 수차례 사업 진행을 막기도 했다. 1958년 설립계획이 시작된 박물관이 1971년 13년 만에 첫 개장을 했다는 데서 이들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합동위원회는 원칙을 정하고 이들을 설득했다. 대원칙은 박물관은 9개 지역 모두의 이익이며, 설립에 기여한 만큼 이익을 배분한다는 것이다. 토지·유물·재정·후원자 등 모든 부분에 대해 이익을 차등배분토록 했다.
대원칙에 따라 각 지역단체들은 앞다투어 산업유산, 유물을 기증하고 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박물관 내부를 순환하는 기차역 벽돌 하나하나에 기증한 개인 및 기관 이름이 새겨졌다. 이같은 방식은 지역간 반목과 갈등을 최소화했다. 합동위는 향후에도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지자체간 갈등 이겨내고 박물관 문열다
1971년 여름, 빔미쉬에서 영국의 문화부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예비전시를 20주 동안 하였고, 이 때 많은 폐가, 공가 및 건물들이 복원 및 리모델링되었다. 박물관 내에 들어선 학교와 교회는 인근 오클랜드에서 통째로 뜯어와 빔미쉬에서 조립한 것이다.
빔미쉬의 아름다움과 추억에 대한 얘기들이 방문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영국관광협회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1만7000파운드를 들여 철길을 복원했고, 뉴카슬의 전차동호회로부터 기증받은 전차를 운행했다. 뿐만 아니라 바클레이 은행은 박물관 내에 들어선 1800년대 은행 건물을 복원해 직접 운영했다. 1973년 말 빔미쉬 합동위원회는 5개년 개발계획이 채택했다.
1976년 빔미쉬박물관의 방문객 수는 20만명이 넘어섰고, 수입이 연간 10만 파운드를 초과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디어 담당관 잭키 윈스턴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는 이 사업이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1970년 중반에 인플레이션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실천이 오늘날의 빔미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빔미쉬는 이제 주민들 것만이 아닌 영국민 전체의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 빔미쉬 박물관은 입장료 수익이 전체 수입에 95%를 차지하며 나머지 5% 정도만을 EU의 지역발전 기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또한 영국 로또자금도 지속적으로 지원이 되고 있어 박물관 운영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그들의 자세도 그야말로 환대 그 자체인 것이다. 빔미쉬는 어느 한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박물관이 아니다. 지역주민·단체·자발적 기증자의 참여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이 때문에 빔미쉬에 대한 영국인의 사랑이 그토록 깊은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빔미쉬박물관의 방문객은 연간 40만명에 이른다.
덧붙이는 글 | 이용규 기자는 희망제작소 뿌리센타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다음 기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산업유산을 활용한 박물관이 가능하며 그 한계를 짚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