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8일.
오늘은 사건 발생 이후 이미 11년째를 맞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 사건의 2심 선고공판이 예정됐던 날이다. 하지만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5부(조희대 부장판사)가 변론 재개를 이유로 선고공판을 무기한 늦췄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자세한 경위파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재판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면, 충분히 살펴보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법원 주변에서는 그보다는 판결을 고의로 회피하는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온다.
@BRI@이 순간 재판에 불만을 품은 한 대학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쏜 희대의 사건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법원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테러"라고 개탄했다. 판결이 불만이라고 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법원도 자성이 필요하다는 지적 또한 적지 않다. 대학교수가 석궁을 쏠 정도로 대한민국의 법치가 땅에 떨어진 가장 큰 책임은 법치를 책임지는 판사, 검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법조인이 연루된 대형 비리사건이 끊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대법원장이 변호사 시절 탈세를 하고 후배 판사들에게 돈을 듬뿍 집어줬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그런 비리를 들춰낸 배후에 검찰이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공·민간기관을 상대로 조사한 신뢰도 실태는 부끄러울 정도다. 법원과 검찰은 10점 만점에 중간도 안되는 4점대에 그쳤고, 그나마 경찰에도 뒤졌다. 법조인 스스로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면 과장일까?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원칙이 의심받은 지는 오래됐다. '법은 강자의 논리'라는 주장을 믿고 싶지 않지만, 현실의 법이 힘있고 돈 많은 이들의 편인 것도 오래된 얘기다. 검찰수사와 법원판결을 두고 '재벌 봐주기', '재벌은 성역',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가?
현실의 법은 돈 많은 이들의 편인 것도 오래된 얘기
법조계에서는 에버랜드 사건은 본질적으로 아주 단순하다고 말한다.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씨는 사건 당시 20대 중반의 해외유학생 신분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자기도 모르게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요 최고 재벌인 삼성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그 비결은 삼성의 비상장기업 주식을 헐값으로 받은 뒤 상장이 되면 되팔아 수십배의 차익을 챙기는 '봉이 김선달식 수법'이었다. 실상이 이런데도 삼성은 이건희 회장과 구조조정본부의 관련을 부인한다.
결국 그것이 여의치 않으니까 이제는 전환사채 헐값발행의 모든 책임을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은 박재중 전 구조조정본부 재무팀 상무에게 돌리고 있다. 박 상무는 사건 당시 일개 과장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당시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임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딱한 일이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96년 10월로 이미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검찰은 사건발생 7년이 지난 2003년 12월에서야 마지못해 기소했다. 또 월급쟁이인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을 배임혐의로 기소하고도, 사건을 계획하고 주도한 실질적 책임자라고 검찰 스스로 의심하는 이건희 회장이나 삼성 구조본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기소 여부를 미루고 있다.
수사능력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의지가 없는 것일까? 오죽했으면 항소심 담당 판사가 수사를 똑바로 하라고 면박을 주었을까? 소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무혐의 결정을 내리는 데 11년이 걸린 검찰의 '눈치보기 신기록'이 깨질 지경이다.
법원도 오십보 백보다. 에버랜드 1심에서 유죄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선고를 앞두고 두 번이나 재판이 연기되는 진통이 있었다. 항소심에서도 재판장의 인사이동 등을 이유로 재판부가 두 차례 바뀌었다. 재판은 벌써 5년째 끌고 있다. 다가오는 법원인사에서 항소심의 주심판사가 다시 전보될 것이라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법원 주변에서는 판사들이 삼성에 미운털이 박히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돈다. 검사는 물론 판사들 인사에도 삼성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시민단체들이 주장할 정도로 삼성의 영향력이 막강한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변호사 시절 에버랜드 사건의 변론을 맡아 무죄를 주장했던 장본인이다. 이러니 판사들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쑤군거림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10년에 걸친 에버랜드 사건처리 과정을 요약하면 검찰의 '시간끌기'와 법원의 '폭탄돌리기'의 합작품인 셈이다. 검찰과 법원 스스로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석궁의 표적이 되는 불행은 우리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