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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기자들이 지난 5일 파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7월 금창태 사장은 삼성그룹 관련 기사를 삭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이윤삼 <시사저널> 편집국장의 사표를 수리했고, 그 뒤 6개월 동안 사측과 기자들은 공방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기자들이 배제된 채 만들어진 '짝퉁' <시사저널>이 만들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정태인 기자는 성공회대 겸임교수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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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태 사장님!
일부 언론은 저를 타고난 독설가인 양 묘사하고 있지만 실은 천성이 모질지를 못합니다. 해서 형식상으로도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편지로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한미FTA 덕에 <시사저널>에도 몇 번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원래 질긴 것인지, 그래서 이른바 '<시사저널> 사태'도 모른 척 할 수 없게 됐습니다. 하여 시사모(sisalove.com)에 실린 사장님의 글을 읽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철현 기자가 "익명의 제보자가 제보한 일방적이고 왜곡된 내용을 토대로 (삼성) 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서 거론되는 CEO들의 명예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기사를 작성했고 결국 민형사상의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서 기사를 뺐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장님께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빌어 '소스의 신뢰성' '입증' '확인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시사저널>에 실리지 못한다는 원칙을 밝힌 지점에 이르러서는 "역시 그랬구나, 그래서 <시사저널>의 기사들이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는구나" 감탄을 했습니다.
물론 이 원칙은 899호와 900호에도 적용됐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실수를 하는 모양입니다. 워낙 일하는 사람이 적으니 또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 알려드리는 이 사실도 위의 세 원칙에 따라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장님의 원칙에 감탄하고 주옥같은 900호 읽어보니...
900호의 주옥같은 기사들 중에 제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기사는 73쪽에 있는 '꿈을 대출하는 '여성전용금고''입니다.
홍선희 편집위원이 쓴 기사인데 영락없이 인도에 가서 쓴 글입니다. 마침 제가 빈민은행(우리나라에도 사회연대은행이 있죠)의 원리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지라,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구글을 검색했습니다.
단번에 비슷한 글을 찾았습니다. 영국의 BBC에서 12월 28일에 방송한 'India's bank for women(☞ 해당 기사 바로가기)'이라는 기사죠.
그런데, 아니 이럴 수가! 홍선희 위원은 아예 이 기사를 거의 다 번역을 했습니다. 지금 바로 클릭만 하시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홍 위원은 이 '신뢰할 수 있는 소스'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의문이 생깁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저야 홍 위원이 인도 만데쉬를 취재해서 쓴 글이라고 믿었습니다만(천연덕스럽게 사진까지 실렸으니까요), 사장님 이하 편집진은 홍 위원이 인도에 갈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을텐데 어떻게 '확인 과정'에서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요? 홍 위원이 혹시 거짓말로 입증을 했나요?
사장님은 삼성의 CEO들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까봐 걱정을 하셨다지만, 이건 완벽한 표절입니다. 만일 BBC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철현 기자의 기사는 법정에서 다툴 여지가 충분하지만 이건 정말 한오라기의 변명도 불가능한 국제적 망신입니다. 이 사실이 로이터같은 통신사의 손을 거치면 <시사저널>은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상황이 이러니 제가 다른 기사도 의심하는 건 당연합니다. 홍 위원의 또 다른 기사 '골드미스를 잡아라, 돈이 되리니'는 조선닷컴에서 옮겨왔더군요. 혹시나 해서 다른 기사도 검색해 봤더니 아…, 우리의 다른 위원들 글도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다른 기사들 원본의 인터넷 주소도 시사모(www.sisalove.com)에 밝혀 놓겠습니다).
한국 언론 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적나라한 '표절'이 일시에 벌어진 상황이라고 해도 그리 큰 과장은 아닐 겁니다. 심지어 899호에는 다른 지면에 실린 글을 다시 <시사저널>에 옮겨놓은 자기표절도 있더군요.
외국언론 표절, 국내언론 표절에 자기표절까지
혹자는 899호와 900호를 '짝퉁'이라고 부릅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짝퉁'이라면 원본 비슷해야 하는데 이건 결코 아닙니다.
몇개의 일간지 또는 방송 기사와 인터넷을 편집하는 것은, 그러다 보니 중간중간에 이미 발간된 다른 매체의 기사에 나오는 문장과 독특한 표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우리가 아는 <시사저널>이 아닙니다. 그런 기사들이, 격조가 지나쳐서 때로는 오만스럽게까지 보이던 저 <시사저널>의 '짝퉁'일 리가 없습니다.
문득 현재의 이 기사들은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 연속 커버스토리를 장식한 정치기사(저는 경제학을 해서 그런지 판에 박힌 정치'소설'은 기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만)를 제외하고는 독창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위기는 기회이고 인생은 새옹지마니까요.
<시사저널>의 '시사'는 아시다시피 영어로 'current affairs'입니다. 그런데 899·900호에서 다룬 것은 대부분 'old affairs'이니 딱 구사(舊事)가 맞습니다.
사실 우리 언론의 큰 병폐 중 하나가 문제가 됐을 당시만 와글와글하다가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후속보도를 하지 않는 것이니, 지금처럼 다른 언론에서 문제가 된 것을 추려내어 다시 정리하고 그 후일담을 잠깐 덧붙여 독자들에게 서비스하는 것도 아주 귀한 사업모델입니다.
그러니 <구사저널>로 제호를 새로 신청하시지요. 더구나 사장님 이하 현 편집진들의 구사(救社)심과도 절절하게 통하는 바 있으니 제 생각에 <구사저널>은 금상첨화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입니다.
별로 상업성도 없는 <시사저널>은 파업까지 하면서 거기 목매는 사람들에게 돌려주시는 것 역시 시의적절이고 안성맞춤입니다.
<시사> 돌려주시고 <구사> 만드시죠
저는 사장님께서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호를 바꾸면서 앞으로 "<구사저널>은 다른 언론에 나온 것들을 번역하거나 정리할 것이다, 다만 899·900호에서는 편집 방침이 바뀐 것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일부 실수가 있었다" 이렇게 선언하시면 BBC 표절 건도 무리없이 넘어갈 수 있을테니까요.
그러지 않으신다면 당장 BBC에 제보를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참고로 저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비지팅 스칼라를 한 관계로, 이런 사실을 알려주면 자기 일처럼 나설 영국 지식인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심사가 복잡하실텐데 너무 글이 길어졌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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