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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면 배추지, '경종 배추'는 뭐래요?"
사실 '경종 배추'를 그날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전부터 우리 동네 사람들이 배추를 꼭 '호배추'라고 칭하고 경종 배추를 별미로 즐기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그 구분을 해보고 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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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배추하고 좀 다른데 우리 어렸을 적에는 경종으로 김치도 담고 김장도 혔는디 요즘은 호배추만 좋아들 하니께."
"그럼 호배추는 보통 우리가 먹는 배추이고, 경종 배추는 재래종 배추란 뜻인가요?"
"그럴 걸, 옛날에는 경종 배추밖에 없었어. 종자를 개량해서 호배추가 나오면서 요즘에는 경종은 거의 안 먹지. 근데 우리는 옛날에 먹던 입맛이 있어서 경종이 없으면 좀 허전해서 쌈 뜯어 먹고 겉절이 해먹을 만큼은 꼭 밭 한쪽에 심게 되더라고."
"경종 배추하고 호배추는 어떤 맛의 차이가 있나요?"
"경종이 좀 질기긴 해도 고소하고 단맛이 있지. 호배추는 경종에 비하면 싱겁지. 그래서 경종은 양념간장에 들기름이나 참기름 좀 쳐서 찍어 먹어도 맛있당게. 생긴 것은 경종이 줄기가 좀 길고 이파리도 큰 편이지."
사실 내 눈으로는 이파리만 봐서는 경종 배추와 호배추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단지 호배추는 잎이 차곡차곡 붙어서 포기가 꽉 찬 상태라는 것과 경종 배추는 잎이 얼갈이배추처럼 떨어져 있으면서 포기가 차지 않고 좀 투박하고 보기에도 좀 억세어 보였다.
과연 경종 배추로 막 버무려 낸 겉절이는 감칠맛이 있어서 자꾸 입맛을 당기는 것이었다. 줄기 표면을 자세히 보니 섬유질이 잘 조직 되어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줄기를 자르면 한 번에 절단되지 않고 섬유질이 실처럼 잘라진 양쪽을 연결한 채로 남아 있어 질기긴 질겼다.
섬유질이 많은 음식을 꼭꼭 씹어서 먹어야 몸에 좋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우리의 몸은 좀더 편한 것을 원하고, 우리의 입은 혀에서 살살 녹는 맛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 재래종 배추와 중국의 배추를 교배시켜서 내놓은 것이 이제는 대중화된 '배추'가 된 것 같다.
"내가 열일곱에 시집을 와서 열여덟에 첫 애를 낳았는데 미역국보다 이 경종 배추로 담은 짠지가 먹고 싶었어. 헌디 우리 시어머니께서 산모가 질긴 거 씹어 먹다가 이 버리면 안 된다고 짠지 단지를 숨겨놓는 거야. 그게 뭐 맛있다고 먹고 싶어서 그때 시어머니 몰래 몸조리하던 이불 밑에 숨겨 놓고 먹기도 했다니께."
안 여사는 요즘 말로 하면 '리틀 맘'이었던 셈이었다. 지금 나이 칠팔십 대 할머니들이야 보통 그 나이에 시집을 가고 아이도 낳고 했지만, 안 여사는 이제 겨우 마흔일곱 살이니 당시치고는 이른 나이였다.
열여덟에 아이를 낳은 리틀 맘이 먹고 싶었던 김치였으니, 안 여사에게는 경종 배추로 담은 김치는 각별한 추억이 있는 음식일 것이다.
"예전에는 김치 냉장고는커녕 냉장고가 있는 집도 드물었잖아. 그래서 봄까지 김치가 무르지 않고 보관하는 일이 문제였거든. 경종은 줄기에 수분이 적어서 가을에 김장을 해서 봄까지 놔둬도 무르지를 않아. 그래서 항상 김장을 할 때마다 경종도 따로 담가 놨는데 올해는 새로 집 짓고 하느라 경종을 많이 안 갈았지(심었지) 뭐야."
"배추 뿌리도 주신다면서요?"
경종 배추에는 삼각형의 뿌리가 달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것도 즐겨 먹는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경종 배추의 뿌리를 '배추 꼬리', '배추 꼬랭이'라고 부르는데, 무와 고구마의 중간치기 같이 생겼다.
도시 출신인 나는 배추에 무 같은 뿌리가 있다는 것도 우리 동네에 와서야 처음 알았다. 그것을 깨끗이 씻어서 칼로 껍질을 매끈하게 까서 먹기 좋게 잘라서 먹으면 매콤 쌉쌀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처음에는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 맛이었지만 좀 먹다 보면 나름대로 당기는 맛이 느껴진다.
무 정도야 이로 가뿐하게 갈아대는 개그맨 갈갈이라도 이 배추 뿌리만큼은 이로 쉽게 갈아 본다고 나서지 못하도록 생긴 것도 녹록지 않지만 정말로 딱딱하고 질기다.
경종 배추는 뿌리까지도 먹을 것이 귀했던 시골 사람들의 한겨울 밤의 간식거리로 내어주던 버릴 게 없는 채소였다. 하지만 길들이기 쉽지 않은 거친 맛의 특성 때문에 지금은 다른 토종 먹을거리들과 더불어 우리 식단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중이다.
배추 뿌리는 경종 배추 뿌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늦가을에 캐서 뿌리만 식용으로 내다 파는 '갓'(돌산 갓과 비슷하게 생겼다)이라고 불리는 것도 많이 심는다. 그것 역시 경종 배추 뿌리의 맛과 비슷한데 소비자들이 포장마차 같은 데서 생으로 술안주로 내놓기 위해 찾는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경종 배추'를 찍어보니 우리 동네에서 내가 수집한 정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경종 배추는 김치보다 짭짤하게 담아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배추지'로 많이 담근다는 새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카페나 블로그에서 경종 배추에 대해 쓴 이야기들도 검색이 되었다. 그런 글들을 읽다 보니 어쩌면 나 혼자만 경종 배추를 새롭게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떤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배추의 한 종류로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골 살이 8년째 접어들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도시 물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 그래서 나한테 시골은 여전히 호기심 가득하고 신기한 것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