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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세 일흔 여섯 내 아버지. 지난 세월, 밥보다 더 많이 드신 것이 약이었다. 9년 전에는 심장인공판막 수술도 하셨다. 수술 후 아버지는 조금만 힘에 부친 일 하셔도 가쁜 숨 몰아쉰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이제 몸이 다 됐나 보다' 하시며 방으로 들어가 지친 육신 천천히 뉘신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으쌰~!' 한 번 소리치면 그 무거운 쌀가마니도 어깨에 가볍게 멨는데, 지금은 몇 킬로그램 나가지도 않는 사료 한 포대도 들지 못한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약해지는 내 아버지. 그래서 슬프다. 아버지 대신해 사료 한 포대 한 포대 들 때마다 너무도 무거운 짐 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BRI@이제 주름 때문에 아버지는 수염도 마음대로 깍지 못한다. 어느 날 면도하고 난 아버지 얼굴 보니 살이 베어 피가 나기에 면도날 바꾸라고 했더니, 면도날이 안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주름이 많아 자꾸만 살이 베인다고 했다.
전동면도기 사드렸더니 그것도 주름 때문에 쓸모없다 했다. 면도할 때 이따금씩 이런 아버지 땜에 울컥할 때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체구, 점점 작아지고 앙상한 손에는 검버섯만이 짙게 드리워진 내 아버지.
이제 아버지는 지게도 못 진다. 그래서 지게 대신 소 외양간 청소도 바퀴 달린 수레로 하신다. 그마저 균형 잡기 힘들어 종종 길에 쓰러뜨린다. 그래도 농사 지어봤자 남는 게 없으니 힘에 부쳐도 소 키우는 일만은 손을 놓을 수가 없다 하시는 내 아버지. 내가 잘 살지 못하는 것이 이런 때는 왜 이리도 죄스러운지 모르겠다.
가난 물려주지 않으려 밤낮 살림 일구신 내 부모
일제 강점기와 6.25, 보릿고개 등 암울하고 고통스럽고 가난하기만 했던 시절을 지나쳐 온 내 아버지와 어머니.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나 많은 식구 먹고 살 길 없어 고향 등지고 낯선 지금의 시골로 왔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기에, 오직 당신 몸 밑천으로 밤을 낮 삼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해 지금의 논과 밭 마련하신 내 아버지와 어머니.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 장이 서는 날이면 시장에 나가 장사까지 하면서 살림을 일구셨다.
먹을 것 얻으러 다른 집 머슴 일도 해 봤다는 내 아버지. 머슴 일 하고 얻은 보리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그래 당신들 자식은 쌀밥 먹이는 것이 소원이라 여기며 이 악물고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고 또 일만 하신 내 아버지와 어머니.
정확히 기억 안 나는 내 어린 시절, 어느 날 아침 하얀 쌀밥이 수북이 담겨 있는 내 밥그릇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니 내 어머니 "오늘이 네 생일이다. 밥이라도 많이 먹어라!" 하셨다. 다른 기억은 잘 떠오르질 않는데 왜 이 기억만은 생생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어 자꾸 나를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부모님 상처 건드릴까, 오는 봄 반갑지 않구나
아버지는 땅을 팔고 내게 전화해 속이 시원하다 했다. 마음 괜찮으냐 물으니, 속이 시원하다 말씀만 계속했다. 시원하다 하지만, 한 평생 그리 고생해 마련한 땅인데, 한 평생 씨앗 뿌리고 거두고 자식 같이 애지중지 여긴 땅인데, 그 땅 처분했으니 그 아픈 마음 어찌 가볍다 할까.
하지만 못난 자식 부모님께 해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마음의 슬픔이 깊어 지친 육신에 더 큰 무거움 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가는 세월 막을 수 없다지만, 자꾸만 그 세월 끝자락으로만 가는 내 아버지 뵐 때마다 부모님 세월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만 해 본다.
이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이제 다른 이의 소유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어머니의 논과 밭에 모가 자라고 고추가 자라겠지. 남은 이 겨울 동안 혹여 묻어 둘지도 모를 아픔이 봄이 되어 또다시 내 아버지 어머니 상처를 건드릴까 오는 봄이 반갑지가 않구나.
덧붙이는 글 | <미디어다음>에도 보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