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인간은 '잘 된 이야기'에 감명을 받을까? 이야기의 내용에 감동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 삶과 죽음의 갈등, 아낌없이 주는 사랑.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감정이입한다. 그것은 알겠다.
하지만 '잘 된 이야기'에 대한 감동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감동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들어맞았다는 쾌감이다. 어째서 쾌감일까? 그리고 '잘 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야기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은 왜일까?"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작가 온다 리쿠의 이 말처럼,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된 이야기'에 감명을 받을 것이다. 추리 소설이든, SF 소설이든, 로맨스 소설이든 장르는 상관없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의 '잘 된 소설'을 좋아한다. 시간을 투자해서 그 많은 소설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어쩌면 '잘 된 소설'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누구나 인정하는 좋은 책을 펼쳐들 때의 기분도 그럴 것이다.
그 책 안에는 왠지 이질적인 공기가 흐를 것 같고, 흐르는 시간이 묘하게 다를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것 같고,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려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책 자체가 하나의 미스터리 아닐까.
온다 리쿠의 소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이런 의문의 책 한 권을 소재로 한다. 작품에서 소재로 사용하는 소설책의 제목도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 책은 약 20여 년 전에 한 무명작가가 자비출판으로 소량 발간한 책이다.
게다가 소량 발간한 책을 주위에 나누어주면서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때문에 이 책은 현재에 와서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이 책을 읽어본 사람들이 입소문으로 퍼뜨린 이야기만 전설처럼 독서가들 사이에서 떠돌 뿐이다.
@BRI@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4부로 되어있다. 4편의 이야기에는 각각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작품 속의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연관이 있다. 누구는 이 책에 얽힌 이상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누구는 이 책의 저자를 찾아내려고 이런저런 사실들을 추리해나간다. 등장인물들에게서 이 책은 일종의 '노스탤지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도 마찬가지로 4부작이다. 작품 속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속하는 4편의 이야기는, 모두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편의 이야기와 조금씩 연관이 있다. 이런 사실들을 꿰맞추면서 책을 읽다 보면 약간 혼란스럽기도 하다.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네 번째 이야기는 '회전목마'라는 제목이다. 온다 리쿠는 회전목마를 싫어한다고 한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가짜 말에 올라타서 한곳을 빙빙 돌기만 하는 행위가 몹시 굴욕적이라고 한다. 게다가 회전목마에 앉아서 밖에 있는 가족들을 볼 때 마다 고독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네 번째 이야기는 앞선 세 개의 이야기와 많이 다르다. 앞선 세 개의 이야기가 3인칭이었지만 네 번째 이야기는 1인칭 위주로 진행된다. 게다가 이것은 저자의 개인적인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소설을 구상하고 진행시킬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설을 이렇게 시작하면 어떨까? 제목은 이렇게 붙이면 어떨까? 1인칭이 좋을까 아니면 3인칭이 좋을까?
게다가 글쓰기의 어려움도 털어놓고 있다. 저자에게 글쓰기란 얼마나 떳떳하지 못한 일인지. 워드 프로세서로 글을 쓸 때의 이상한 기분, 그리고 쓸 때는 재미있지만 다음날 다시 보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깨달았을 때의 느낌까지. 즐겁게 글을 쓸 때조차도 항상 떠오르는 문구 하나.
"쓰기 시작하면 안 써지는데, 쓰기 전에는 써지려고 한다"
물론 '회전목마'에도 작은 소설이 한 편이 들어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조금씩 진행되는 소설의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저자가 이후에 발표하는 장편소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축소판이다.
온다 리쿠는 회전목마를 싫어한다. 하지만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다 보면, 그리고 저자가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회전목마가 연상된다. 한곳에서 빙빙도는 느낌? 그런 느낌이 아니다. 왠지 모든 것이 얽혀있고 꼬여있지만 마지막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다. 여러 차례 뒤집혀서 진행하더라도 결국에는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온다 리쿠의 이후 작품들의 출발점이나 마찬가지다. 이 4편의 이야기에서 암시해 놓은 것들로부터 온다 리쿠는 여러 편의 장편 소설을 발표한다. <보리의 바다에 가라 앉는 열매> <흑과 다의 환상> 그리고 <황혼의 백합의 뼈>에 이르기까지.
굳이 분류를 하자면 미스터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온다 리쿠는 일본에서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는 명칭을 얻고 있다. 그런 만큼 저자의 작품을 읽다 보면 머나먼 어딘가로 떠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기시감. 버스나 기차를 타고 정처없이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 낯설지만 편안한 곳에 도착해서 한없이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여유로움.
'잘 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온다 리쿠의 말처럼,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이야기도 그 자체로 잘 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온다 리쿠의 수많은 소설 중에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온다 리쿠 지음 / 권영주 옮김. 북폴리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