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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지 설명을 하고 있는 전남역사교사모임 우명조 선생님
답사지 설명을 하고 있는 전남역사교사모임 우명조 선생님 ⓒ 전국역사교사모임
"궁삼면 요것이 면 이름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경선궁의 궁토로 토지를 몰수당했던 세 면을 부르는 말입니다. 이들 지역의 농민들의 처절한 투쟁이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전남역사교사모임 우명조 선생님이 궁삼면 항일농민운동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타고난 입심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재미와 흥미를 곁들인 설명이었다. 설명을 듣는 선생님들은 설명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우명조 선생님의 유머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기도 했다.

궁삼면이란 영산강변에 있는 욱곡, 지죽, 상곡 세 개 면을 일컫는 말이다. 영산강을 젖줄로 살아가는 전남 나주에 있는 마을들이다. 이들 마을은 영산강 유역의 홍수 피해가 잦아 사실상 버려진 황무지였다. 그런데 1886년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면서 형식상 자유의 몸이 된 수많은 노비들이 영산강변에 집단으로 모여들어 황무지를 개간하게 되었다.

문순태 장편소설 타오르는 강
문순태 장편소설 타오르는 강 ⓒ 이기원
"아이고 이 양반아 새끼내에서 농사를 짓기란 칼 물고 뜀뛰기여."
"칼 물고 뜀뛰기라뇨?"
"농사를 지어봤자 큰물이 옴씰하게 쓸어가버리는디 어뜨게……."
-문순태, 타오르는 강 1권, 82~83쪽


영산강 유역 새끼내 황무지를 개간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실감나게 묘사된 대목이다. 하지만 노비 신분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이들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땅은 어디에도 없었다. 쓸만한 땅은 양반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풀려난 노비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 지역을 개간한다. 하지만 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둑을 쌓아올린 둑이 한 번의 물난리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 처절한 상황이 '타오르는 강'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순식간에 새끼내 온 들판이 물바다가 되어버렸다. 새끼내 들판에 물이 차오르자, 영산강물이 거꾸로 밀고 올라오면서 들판이 물바다를 이루어, 강인지 들인지조차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강물이 거꾸로 덮쳐오자, 선창 사람들은 서둘러 솜과 이불을 들쳐 메고 산으로 기어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아우성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형 죽고 싶어? 어서 올라와!"
"응보 미쳤는가?"

대불이와 새끼내 사람들이 목이 쉬도록 응보를 불렀으나, 응보는 괭이를 놓지 않았다. 물길을 혼자 힘으로 막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잘 익은 뱀딸기처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찔러보며 미친 듯이 괭이질을 하였다.
- 타오르는 강 1권 , 175쪽


목숨을 건 사투에도 불구하고 둑은 무너지고 모든 게 물 속으로 잠겨버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이들은 다시 둑을 쌓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더 크고 단단한 둑을 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을들이 지죽면, 욱곡면, 상곡면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겐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가혹한 흉년이 들어 조세를 제대로 납부하지 못한 걸 이유로 이들의 토지가 경선궁의 궁토로 몰수되고 말았다. 수마와 싸우며 일군 이들의 생명과도 같은 땅이 궁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들 세 개의 면을 궁삼면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산포에 남아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
영산포에 남아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 ⓒ 전국역사교사모임
일제의 지배 하에서 경선궁이 소유했던 궁삼면의 토지는 일제에 강제 매수당해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폭력적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칼 찬 일본헌병과 순사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웬 양복쟁이 한 놈이 쇠메를 내려치면서 '동척소유'라는 팻말을 박기 시작하자, 한 노파가 한사코 그 팻말을 뽑아 내팽개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땅은 경선궁으로부터 동척이 샀으니 그리 알고 앞으로는 동척에 소작료를 내시오."

그들은 노파를 밀쳐버리고 다시 그 팻말을 박기 시작했다.

"남의 땅을 왜 이렇게 무법하게 강탈하느냐?"

노파가 울음 반 고함 반으로 계속 반항하자 일본 헌병이 나타나서 그 노파의 목에 포승줄을 칭칭 감고 군도 자루와 몽둥이로 미친 개 다루듯 두들겨 팬 것이다. 그 노파는 잠시 후 헌병의 손아귀에서 빈 자루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 전국역사교사모임, 호남문화의 젖줄 영산강 문화권을 찾아서 자료집, 85~86쪽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사무소가 영산포에 개소되어 이 토지를 관리했다고 한다.

피와 땀으로 개간한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이 땅을 되찾기 위해 또다시 피와 땀을 쏟아야 했다. 1880년부터 1950년까지 나주 일대의 농민들은 처절하고 끈질기게 투쟁을 지속했다.그 치열한 투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해 본다.

나주 궁삼면 항일농민운동 기념비
나주 궁삼면 항일농민운동 기념비 ⓒ 전국역사교사모임
날씨도 쌀쌀한 늦가을 면민들 수천 명이 손에 몽둥이와 장작개비를 하나씩 들고 메고 동곡리 일본인 가미야 집에 숨어 있다는 동척 조합장 엄규환을 잡아 죽인다고 쳐들어갔다. 그때 세지면 주재소 야마구치 순사부장이 일본도를 빼들고 면민들을 내리칠 듯이 위협하는 순간 그 근처 죽동리에 살던 나사만이 내리친 장작개비에 야마구치가 뒤통수를 맞고 그 자리에 쭉 내뻗었다. 이를 신호로 피아간에 혼전이 벌어지면서 죽여라 죽여라 하는 함성이 그 일대 내정리, 대산리까지 반경 4㎞ 들녘을 완전히 휩쓸어버린 것이다. 동곡대전이라 불린 이 사건은 지금도 이 지방의 자존심으로 회자된다. -전국역사교사모임, 호남문화의 젖줄 영산강 문화권을 찾아서 자료집, 88쪽

이들의 끈질기고 처절한 투쟁은 해방 후에야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들의 한과 눈물과 투쟁이 영산강의 물길 속에 녹아 흐르고 있다. 이들의 한과 눈물과 투쟁에 대해 문순태는 '타오르는 강'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영산강에는 한이 흐르고 있다.

아무런 욕심도 없이 '내 땅'을 지키고 살며, 조금 여유가 있으면 술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판소리, 육자배기 한바탕 꺾는 것이 '꿈의 전부'인 이들은 끊임없이 빼앗기고 짓밟혀왔다. 그러나 이들은 한을 한숨과 체념으로 주저앉히지 않고, 원한이라는 무서운 힘으로 싸웠다. '한의 실꾸리'를 감지만 않고 풀었다. 한은 곧 횃불과 칼날로 변한 것이다.


답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영산강이 보였다. 영산강은 타는 저녁놀을 온몸에 안고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월 12일부터 1월 15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주관하고 전남역사교사모임이 준비한 자주연수가 있었다. 이번 자주연수의 주제는 '호남 문화의 젖줄, 영산강 문화권을 찾아서'였다. 이 기사는 답사 코스 중의 하나였던  궁삼면 항일농민운동 유적지를 답사하고 쓴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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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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