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왕망)이 구정왕(句町王)을 후(侯)로 깎아내리고, 서역(西域)에 대해서는 그 왕들을 모두 후로 바꾸었고, 선우(單于)도 복우(服于)라고 불렀으며,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불렀다. 지금은 모두 그 작호(爵號)를 회복시켰다."(莽貶句町王為侯 西域盡改其王為侯 單于曰服于 高句麗曰下句麗 今皆復其爵號)
이에 따르면, 왕망이 주변 이민족 국가들에게 '심통'을 상당히 많이 부렸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남쪽의 구정, 서쪽의 서역제국(西域諸國), 서북쪽의 흉노족, 동쪽의 고구려에 대해 한결같이 그 군주의 호칭을 격하시켰다. 구정·서역·고구려의 '왕'을 '후'로 격하시킨 것이다. 그리고 흉노족의 선우는 복우(服于)라고 불렀다. 복우는 문자 그대로 복종(服從)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고구려에 대해서는 한 가지 '벌칙'을 더 얹어 주었다. 군주의 호칭만 격하시킨 게 아니라, 나라 명칭까지 고구려에서 하구려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왕망의 이러한 대외정책은 결국 그 자신에게 '재앙'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주변국들이 신나라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반고는 <한서> 권24상(上) 식화지에서 "만이(蠻夷)들이 화하(華夏, 중국)을 어지럽혔다"라고 기술하였다.
왕망은 안 그래도 내부에 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개혁정책은 보수적 기득권층의 반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스스로 외부의 적까지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안팎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왕망의 신나라는 결국 개국 1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후계자를 두지 못한 왕망은 이후 중국 역사에서 두고두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왕망이 이상적 개혁의 꿈을 끝내 성취하지 못하고 슬픔 속에 사라진 이유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방을 인정해 주지 못하는 그 '속좁음'이 결국 화를 부른 것이다.
중국의 국제관계가 안정된 것은 왕망이 죽고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한 뒤였다. 내부적 안정이 절실했던 광무제는 주변국들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환으로, 그는 하구려를 다시 고구려라고 부르고 고구려 군주의 칭호도 왕으로 되돌려놓았다. 중국의 안정을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얼마 전부터인가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북한'(North Korea) 대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이 듣기 좋아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최근 들어 북미관계를 점차 안정시키고 있다. 옛날이건 지금이건 간에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것이 외교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