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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겨울 도둑처럼 찾아온 IMF를 서민들은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사진은 지난 2005년 3월 서울 남대문 시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친 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가 한국에 와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여러분, 저는 악마가 아닙니다, 당신들을 도우려고 왔습니다."

그가 TV에 나와 '꼬부랑 말'을 '톡톡' 뱉어낼 때마다 한국 국민들은 심장을 쓸어내려야 했다.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임창렬씨는 밤낮 없이 김포공항을 들락거렸고 우리는 그가 빌게이츠를 능가하는 천재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 무렵에 나는 대기업 사원으로 무난하게 잘 살고 있었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회사에서 군 특례를 받았고 나이 스물아홉에 11년차 중견 직원이었다. 내 또래의 대졸자들은 갓 입사를 한 신입사원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명문대를 졸업한 이른바 '엘리트'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대학을 안 나온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내 실력에 명문대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어느 소도시의 대학을 나왔다쳐도 대기업에 당당히 입사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리고 별 흥미도 없는 공부로 대학 졸업장을 받기 위해 무조건 대학에 가야 된다는 사고방식도 내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렵다. 내 동기들의 70%는 낮에 일하며 야간대학을 졸업했다.

국민들 금반지 내놓던 시절, 나는 회사를 떠나고

당시 "뭐든지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한다"는 바람이 몰아치면서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이 아이 돌 반지까지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회사도 글로벌기업에 매각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불안했던 직원들은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단체행동에 나섰고 평소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던 나는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사실무근'이라는 경영자의 해명과는 다르게 회사는 헐값에 외국기업에 매각됐다.

그리고 세기말 운운하며 뒤숭숭하던 1999년 봄, 나는 '희망퇴직'이라는 명목으로 12년 동안 내 청춘의 동반자였던 회사를 떠났다.

서른 살에 뜬금없이 실업자가 된 나는 허망하고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횟집 하나를 인수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이후 자영업자로서 내 삶은 '눈물나는 코미디'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때까지 회사만 왔다갔다 했던 나는 식당일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고생은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내가 인수한 횟집은 침몰하는 배처럼, 들어오면 누구나 떠나려 안달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평생 모은 재산과 갖은 수단을 동원해 받은 대출금을 모두 이 외진 가게에 쏟아부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다른 횟집들이 슬슬 휴업을 준비하는 6월, 내 별명을 따서 '울랄라 횟집'이란 간판을 걸고 근사하게 개업식을 열었다. 당시 나는 도다리, 광어는 고사하고 농어와 숭어도 구분 못했다. 모든 것은 주방장 아줌마가 맡아했다. 나는 회사친구들에게 그저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돌렸고 그게 내가 믿는 전부였다.

개업 후 보름 정도까지는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다. 회사에서 과장은 고사하고 반장도 못 해봤던 나는 한순간에 '사장님'으로 신분이 격상(?)됐다. 그 사장 소리가 그렇게 흐믓할 수가 없었다. '사장님'이 된 나는 개량한복을 잘 갖춰 입고 주위 사장들과 어울렸다.

남들에게 '괴짜' 소리를 듣던 나는 앞에 나서서 떠드는 걸 별나게 좋아했다. '사장님'이 된 나는 주방장, 서빙 아줌마들을 모아 놓고 조회나 종례라는 명목으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때가 많았다.

한번은 한창 핏대를 올려 연설을 하고 있는데 손님이 가게로 들어왔다. 그땐 아마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손님들에게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라…, 다음에 오세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주위 예상처럼 손님은 점차 줄어들었고 일하던 식구들은 한날 보따리를 쌌다. 급기야 주방장 월급을 줄 형편이 못 돼 내가 직접 회를 썰어야만 했다. 그 후로는 어쩌다 한번 들른 손님도 두 번 다시 오는 일이 없었다.

'이대로 잠들어 눈을 뜨지 않았으면...'

결국 팔아먹는 고기들보다 수족관에서 늙어 죽는 고기가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경제적 어려움을 몰랐던 나는 카드 값, 대출 이자, 외상 값 등 하루 10통 이상의 독촉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이대로 잠들어 내일 제발 눈뜨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2년 동안은 아예 고향에 갈 수도 없었다.

앞도 옆도 보지 못한 채 오로지 오늘을 살아 내는 일만 반복하며 2년을 버텼다. 그래도 운이 따랐던 것일까. 거들떠보지 않던 가게를 맡아 해보겠다는 이가 나타났다. 나는 미련 없이, 한 많았던 '울랄라 횟집'을 접었다.

그런데 문제는 난해한 수학공식 같은 현실을 그토록 직시했으면서도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내 모험정신이었다. 개인 사업에 데었으면 차라리 변변한 직장을 구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내게는 누구도 못말리는 장난끼와 말도 안 되는 무모함이 있었다.

또다시 나는 가능한 모든 것을 털어서 난데없이 결혼정보회사 '조우'(JO WOO)를 설립했다. 친구들은 "넌 장가도 못가면서 남들 결혼시킨다고?"라며 폭소를 쏟아놓았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펜팔카드 같은 홍보물을 만들어 창원·부산에 가득 뿌렸다. 예상대로 많은 문의가 들어왔다.

총각인 나는 노트 한 권을 들고 20대 후반의 여성을 한없이 만나고 다녔다. 무료로 회원이 됐던 여성들은 호기심이 많았다. 하지만 내 손으로는 도저히 빚어낼 수 없는 남성을 원하는 예가 많았다. 남성들은 예상보다 회원이 되기를 주저했다. 결국 지출해야 할 돈은 많고 들어오는 돈은 별로 없으니 회사가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일이였다.

득달같이 붙어있는 빚의 무게가 또 나를 넘어지게 했다. 이번엔 건물 주인에게 자연스럽게 쫓겨났다. 그때 내게 약간의 여유가 있어 투자를 제대로해 신뢰할만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꾸준히 밀고 갈 수만 있었다면, 회사는 확실히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위로를 해본다. 온·오프라인을 조합한 기획은 지금 생각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 후로도 몇 푼의 자금이라도 손에 쥐면 나는 전혀 생소한 사업을 벌였다. 때론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지만 대부분 고전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하고 갖가지 일을 하며 얼마간의 '여유'를 마련하는 중이다.

두 번의 실패도 꺾지 못한 도전정신

세상과 나 사이에 IMF가 없었더라면 지금도 나는 무던한 회사원으로,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삶이 쫄딱 망했다거나 완벽한 실패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자위하고 산다.

나는 이제 벼락부자가 되는 꿈을 버렸다. 그러나 즐겁고 기쁘게 살고자 하는 꿈을 버리진 않았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즐거워지는 길은 천하에 널려 있음을, 죽을 고생 끝에 알게 됐다고 감히 고백한다. 나는 언제나 기쁘고 즐겁게 살다가 죽고 싶다.

IMF를 거치며 서민 대다수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코미디언 쟈니 카슨이 "흥망을 거듭한 민족은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 속에서 유머가 넘친다"라고 했다. 우리 민족도 좀 여유를 누리고 유머를 즐기며 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를 정색하고 따지는 이들을 만나면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특히 정치인들이 '물어뜯고 지지고 볶는' 그 꼬락서니를 보면 '참 고생 안 해본 이들'이라는 조소를 지울 수 없다. IMF 10년, 누구와도 격려를 나눴으면 좋겠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 즐겁게 삽시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응모글


태그:#IMF, #자영업, #희망퇴직,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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