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르네 마그리트 / ‘꿈의 제국-르네 마그리트전’ 4월 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르네 마그리트 / ‘꿈의 제국-르네 마그리트전’ 4월 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 여성신문
양복점에 누운 인어

어린 시절 그 양복점 앞을 지나는 일은 난감했다. 무슨 연고인지 양복점 쇼윈도에 괴이한 그림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인어를 묘사한 것이지만 안데르센형 인어공주가 아닌 것이 문제였다. 여자의 벗은 두 다리 위로 고등어(?) 머리를 달고 해변에 누워 있는, 상식을 역전한 인어. 이 민망스러운 그림에 시선을 붙잡힌 채 악몽처럼 서 있던 기억. 이제는 이발소의 만종이나 돼지그림처럼 그 시절의 노스탤지어가 됐지만 말이다.

이 문제 있는 그림이 ‘보편적 중력’이라는 골치 아픈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작가는 싸구려 엽기, 변태 춘화가가 아니라 마그리트라는 초현실주의 거장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그러나 유방·배꼽·음부로 이뤄진 나신을 눈·코·입의 얼굴로 만든 그의 또 다른 작품 ‘강간’을 보고도 불편함과 분노를 넘어 이해를 할 수 있게 된 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다시 시작한 마그리트 여행

고약한 유년의 기억을 안겨준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제대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진중권의 책 ‘미학 오딧세이’를 읽고서였다. 1994년엔가 읽던 책을 펼쳐보니 당시 세살배기였던 큰 아이가 ‘오토마티즘’(초현실주의자들이 의식의 흐름대로 그린 그림 형식) 기법으로 해놓은 낙서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연년생 젖먹이들을 양손에 안고서 우유를 데우며 기저귀를 갈다가 책을 넘기곤 했던 그 ‘미친 년 책 읽기’의 와중에 마그리트가 미술을 가지고 철학을 시도한 이지적인 작가이며, 그의 작품이 지적인 매혹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책의 안내를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 체류하던 시절 ‘퐁피두 미술관’에서 있었던 대규모 초현실주의전의 포스터를 잊을 수가 없다. 단발머리의 여인이 책을 읽다가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고 있는 장면이 그려진 마그리트의 ‘복종적인 책 읽는 여인‘이었다. 검은 라인으로 간결히 그려진 그림이지만, 초현실주의를 만나는 초현실적 상봉의 순간을 이토록 본질적이고 인상적으로 묘사한 작품도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선택의 센스와 유머에 감탄했던 기억도 있다.

<콜콘드 Golconde> 1953, 화판위에 과슈, 15.8x18.4cm
<콜콘드 Golconde> 1953, 화판위에 과슈, 15.8x18.4cm ⓒ 여성신문
우울과 축복

서울에서 르네 마그리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전시장에 들어서자 또 다시 내 발을 묶은 작품은 여전히 음울한 그림이었다. 강가를 배경으로 검은 두 토르소가 나란히 놓인 ‘강에 사는 사람들’. 이것이 그가 14세 때 강에서 자살한 어머니에 대한 회고라는 사실이 슬펐고, 목 주위에 연결된 것이 얼굴이 아닌 거꾸로 된 다리라는 것을 알고 서늘함을 느꼈다. 검은 죽음을 입고 다닌 생시의 어머니와 잠옷을 뒤집어 쓴 채 시신이 되어 돌아온 어머니의 다리가 한 화면에 조합된 것이다.

유년의 우울한 체험이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하여 일반론을 가지고 말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천천히 자멸하는 것, 그것이 나의 성향”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둠으로부터 그를 구원할 뮤즈이자 모델이고 반려인 조제트를 만난 것은 축복이었다. 수많은 뮤즈를 옮겨 다닌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달리 그는 평생을 조제트와 함께 했다.

관념과 실제의 그림자놀이

그는 살바도르 달리처럼 일부러 기괴하고 과장된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흔한 사물들을 제대로 묘사하지만 일상의 사물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상황은 아주 낯설어질 수도 있다. 이른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이다.

창 옆에 뻣뻣하게 직립한 물고기를 그린 ‘고립’의 방식, 사과를 돌로 만드는 ‘변경’, 맨발과 구두를 합체시키는 ‘중첩’, 종탑이 생물처럼 뿌리를 내리는 ‘잡종화’, 거대한 꽃 한 송이로 방을 가득 채우는 ‘크기 변화’, 만날 수 없는 두 사물을 한데 몰아놓은 ‘이상한 만남’, 캔버스와 밖의 풍경이 붙어버리는 ‘응축’, 새가 나뭇잎이 되는 ‘전이’, 한낮과 심야 풍경이 양립하는 ‘패러독스’ 등이 그것이다.

연인 조제트를 그린 <검은 마술 Black Magic>, 1945, 캔버스에 오일, 80x60cm.
연인 조제트를 그린 <검은 마술 Black Magic>, 1945, 캔버스에 오일, 80x60cm. ⓒ 여성신문
마그리트 매트릭스

화면의 이상한 결합, 이상한 관계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의 일상적 관념은 그 안에서 서로 충돌하며 혼돈에 빠지고 여기서 헤어 나오는 과정에서 질문이 시작된다.

“왜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라는 거지? 물론 그림 파이프는 실제 파이프가 아니지. 또 ‘파이프’라는 언어가 실제 파이프도 아니지. 그럼 실제와 관념과 언어는 어떤 관계지?”

언어의 규칙을 일부러 위반할 때 익숙한 질서는 무너진다. 진중권은 이것을 ‘사물의 질서가 파편이 되어 무너져내린 폐허’라고 표현했다. 이곳은 동시에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지대가 되고 마그리트는 미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철학을 요구한다.

마그리트가 초대하는 관념의 미로 속을 오래도록 헤매다가 전시장을 나서는데 예의 중절모를 쓴 그가 덕수궁 돌담길에 서 있다. 참 낯선 풍경! 서 있나 싶었는데 둥둥 떠오른다.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처럼 무한 복제되더니만 시청 위에, 플라자 호텔 위에. 서울신문사 옆에, 청계천 위에 둥둥 떠 있다. 떠 있나 싶었더니 이제 비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어두워진 하늘, 빗길을 총총히 걸어가는 퇴근길의 행인들과 자동차들의 행렬 위로 ‘골콘드. 서울. 시청. 2007’이 완성되고 있었다(골콘드·마그리트의 대표작. 신세계백화점의 공사 가림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미술평론가 제미란씨의 글입니다.


댓글

(주)여성신문은 1988년 국민주 모아 창간 한국 최초의 여성언론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