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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이 보내주신 쌀포대
사모님이 보내주신 쌀포대 ⓒ 조명자
명절 선물로 20킬로그램의 쌀 포대를 받았다. 선물 받는 것 싫어하는 사람 있겠냐만 선물, 그 중에서도 쌀 선물은 가격과 상관없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품목이다. 쌀 소비가 줄어 아무리 쌀이 남아돈다 할지라도, 물건 값 중에 오르지 않는 게 쌀뿐이라 할지라도 뒤주 속에 그득 담긴 쌀을 보자면 올 한 해 먹고 살 걱정을 한번에 날리는 것 같은 포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BRI@그런데 그에 덧붙여 보내신 분이 남편의 고등학교 때 은사님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가신 은사님의 사모님이 보내주신 선물이라 행복이 배가 되는 기분이다. 남편의 고등학교 때 은사님이시라.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냐. 무려 40여 년 전의 인연이다.

그 오랜 세월, 얼마나 각별한 인연이었으면 사모님이 돌아가신 선생님의 제자까지 챙기실 정도일까? 85년,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제자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매년 선생님의 추모식을 거행할 만큼 그 어른이 끼친 영향은 크고도 넓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평생 평교사로 봉직하신 김용근 선생님은 남편이 고등학교 때 역사를 가르친 선생님이셨다. 전남 강진 작천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학교로 유학을 할 만큼 선생님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는데, 그 유학 시절 선생님을 평생 반골로 살아가게 만든 인연이 만들어진다.

일제하 1936년, 마침 옥고를 치르고 평양을 들른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게 된 계기가 그것이다. 도산 선생님을 뵌 김용근 선생은 벅찬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둔 질문 하나를 던진다.

"선생님, 우리 민족이 제대로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질문을 받은 도산선생은 꽤 긴 침묵 끝에 답을 하셨다 한다.

"지금 이 민족을 위해 사는 길은 고향에 가서 돼지 한 마리라도 전문적으로 기르는 것을 공부해라. 전문적으로 돼지를 길러가는 그 속에서 바로 민족의 현실에 기여할 힘이 나오지 않겠느냐?"

민족혼에 눈 뜬 김용근 선생은 숭실학교 종교부장을 맡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 군국주의에 저항하는 활동을 시작해 마침내 두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한 번은 숭실학교 졸업 후 개량서당의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또 한 번은 연희전문학교 시절 독립운동 쪽과 연결을 가지며 학내에 '총독 암살단'을 조직한 것이 발각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형을 받은 두 번째 감옥생활 때는 이미 결혼을 해 장남이 태어났을 때였다고 한다. 해방을 맞은 선생은 투옥생활로 중단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연희전문학교에서 연세대학으로 승격된 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다.

연대 시절에는 농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고 현제명 교수 밑에서 호른과 클라리넷을 배워 관현악단의 연주자로 활약할 만큼 선생은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학생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선생은 이 나라를 짊어질 일꾼을 키우는 소명을 당신의 평생 업으로 결정한다.

첫 부임지 전주고등학교. 선생은 그 곳에서 '신석정' 시인과 인연을 맺게 된다. 때로는 한 집에서 또는 이웃집에서 10년을 같이 살았는데 둘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던지 선생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둘의 에피소드를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 양반과 한 10년을 같이 살았는데 나를 굉장히 사랑하시고 아껴주셨었지. 간혹 가다 선생님은 어째서 나를 좋아하시오? 하고 물으면 그 양반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어."

"너는 어째서 맨날 '백성 民'자만 얘기하냐? 내 시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너를 좋아할 수밖에…."

전주고, 광주일고, 전남고, 광주고. 지역에서는 내로라 하는 명문고로 행세하던 곳이었으니 학생들의 자부심과 자만심은 오죽했을까. 선생은 부임지마다 반듯한 학생을 키우고자 혼신을 다하셨던 것 같다. 왕년의 농구선수였던 선생이었기에 학교 농구부 감독을 맡으셨고 될성부른 아이들의 동아리모임에 지도교사를 자임하시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 네 군데 학교 출신 제자들이 아직까지 선생을 기리는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서로 형제처럼 어울리고 있으니 선생님의 음덕이 시공을 초월해 제자를 엮을 수 있는 크나큰 그늘이 된 셈이다.

제자, 황지우 시인이 그린 선생님 초상
제자, 황지우 시인이 그린 선생님 초상
김용근 선생님을 회고할 때마다 남편은 두 가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선생님은 근대사 그 중에서도 박지원,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사상을 늘 강조하셨어. 어찌나 '실사구시'를 외치셨던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니까. 그리고 또 하나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영어공부를 얼마나 강조하셨는데.

그때는 사실 반감도 있었어. 영어 잘 해 미국놈들 꽁무니 따라다니라는 건가 뭔가. 돼지 키우는 전문가가 되어 민족현실에 기여하라는 도산선생님 말씀과 맥이 닿는 가르침, 그만큼 선생님은 실용주의 노선이 분명하신 분이었다고도 할 수 있지."

고등학교, 혈기방창한 그 나이 학생들에게 선생은 수업 시간 틈틈이 인생의 지표가 될 만한 가르침을 강조하시곤 했다 한다. '사람은 두 번 나는데 한 번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또 한 번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역사 속에서 가치관을 정립하고 깨달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그때는 뭔 말씀인지 통 알아듣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 양반의 민족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실감하게 되더라는 게 제자들의 회상이다.

남편의 죽마고우는 선생님 때문에 인생이 180도 회전된 경우다. 공부를 무진장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그 친구는 학창 시절 판검사가 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하도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살라'고 강조하시고 툭 하면 "대학 입학만을 위한 공부는 참고서에 다 있다. 대학이 뭔가? 먼저 인간이 되야제" 노래를 부르셔서 그 말씀에 현혹되어 대학도 때려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던가.

자칭 소도둑놈. 우락부락한 인상에 시커먼 눈썹을 꿈틀거리며 선생은 교탁에서 사자후를 외치시곤 했단다.

"한국사의 흐름을 왕조중심에서 민중중심으로 바꿔봐야 한다. 역사를 전개시켜온 힘의 근원도 민중의 생명력에서 나왔고 엄청난 국난과 고난을 헤쳐 온 자들도 바로 민중이다. 이걸 모르면 안되여!"

제자들과 낚시를 다니며 막걸리잔도 기울이시고 손수 집에 불러 모아 재우고 먹이고 사람 사는 도리에 대해 끊임없이 깨우침을 주시던. 그래서 사모님은 제자들이 남 같지 않다고 하신다. 당신 자식들과 똑같이 거둔 제자들이니 어찌 자식 같지 않으실까.

은퇴 후 고향 작천에서 '노인대학'을 설립하시고 강연과 향토 사학자로 활동하시던 선생님. "우리 노인들이 내 강연을 듣고 눈이 트였다"고 행복해 하시던 선생님 생전 모습. 그러나 선생님의 말년에 또 한 번 옥고를 치르게 된다.

'광주 민주화 항쟁' 그 소용돌이의 주역들인 제자들을 피신시킨 죄로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오신 것이다. 환갑이 넘은 연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수모. 감방 안에 끌려와 먼저 붙잡혀 만신창이가 된 제자들을 보시곤 선생님은 "야, 이 놈들아. 이 놈들아…" 하시며 눈물을 쏟으셨다고 한다.

피투성이가 된 제자들을 보며 억장이 막혔던 마음. 당신이 맞으면 맞았지 차마 자식이 고통 받는 꼴은 볼 수 없었던 어버이 마음, 그 마음이 선생님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69살, 한창 사실 연세에 선생님은 급환으로 돌아가셨다. 선생님은 떠나셨어도 그 훈기와 가르침은 잊지 못하는 제자들이 모여 '김용근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선생님 사후 받게 된 5·18 보상금을 종잣돈으로 제자들이 회비도 내고 모금도 해 '김용근 민족 교육상'을 제정했다.

매년 5월, 선생님 기일에 맞춰 광주민주항쟁 투사들이 잠든 망월동 묘역에서 시상식을 갖는다. 올 해로 열두 번째던가? 교육현장에서 말없이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꿈나무를 키우는 선생님들. 그 현장의 주역들이 시상 대상이다.

광주항쟁 때 '범인 은닉죄'로 고초를 겪으신 선생님. 선생님의 공소장엔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으로 투옥당한 기록이 '전과 2범'으로 명시되어 있더란다. 그 공소장을 보시며 헛웃음을 웃던 선생님. "참말로 일제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아야" 하시던 말씀.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땅에 민중이 잘 사는 '민주화의 길'은 아직도 멀고 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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