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전통적 혈연사회로 부모,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3대가 한집에 사는 대가족제도가 남아 있다. 지난 연말 초청을 받아 찾아간 한 필리핀 가정도 식구가 12명이나 되었다. 어릴 적 살던 우리네 고향집을 연상하면 딱 맞을 것 같다.
한 집에 자녀가 5∼6명은 보통이다. 20살이 넘으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며 독립해서 나가 살기 전에는 부모와 함께 산다. 가톨릭 사회이다 보니 산아제한은 불문율로 금지되고 있으니 아기를 많이 낳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사는 중심에는 바로 강인한 필리핀 여성이 있다.
필리핀 여성들의 삶은 어떠할까? 한마디로 가정의 모든 일을 안고 가는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다. 결혼생활의 모든 책임은 대부분 아내 쪽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남녀평등과 쌍계(雙系)사회라는 말은 하지만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은 그대로 남아 있다. 결혼을 하면 여성은 남편 성을 따라가야 한다.
첩을 두는 것도 남자의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런 상황을 알고도 억울하게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이 필리핀 엄마들이다. 바랑가이(씨족집단 마을)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오죽하면 남편이 첩을 두었을까, 남편 대접이 시원찮고 몸단장을 잘못해서 그렇지 하면서 마을사람들이 수군거린다. 남편 흉을 보고 떠벌려봐야 소용없다. 남편에게 헌신하고 주위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남편이 정부를 버리고 돌아 올 수 있다.
필리핀은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은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천국인 것 같다. 대통령도 여자고, 이곳 대학총장도 여자다. 사회 곳곳의 요직을 여성이 두루 차지하고 있으며 각종 전문직에도 여성파워가 미치고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남편보다 자녀양육을 책임지고 그들의 성장과정에 직접 관여하게 된다. 가정의 운영권은 여자 몫이며 자녀교육에서 돈벌이까지 심지어 남편의 출세까지도 적절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남자들은 집 앞에서 빈둥거리고 놀지만 여성들은 가정 경제를 위해 일터로 나간다.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가사담당이자 자녀양육의 책임자이며 대가족을 운영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한 집안에 자녀가 출세라도 하면 그 결과는 모두 엄마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돌린다. 따라서 자식도 당연히 아낌없이 베푼 엄마의 헌신에 감사와 애정을 갖게 된다.
그들은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가족의 가치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 같다. 자식이 나중에 잘 되어 칭찬을 받던 잘못되어 지탄을 받든 그 결과는 모두 엄마의 몫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의 최대 몫은 자식이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탈선하지 않고, 사회적 친화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나 손위형제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듣고 자란다. 그래서 ‘부모는 평생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 이라고 자녀들은 생각한다. 자신도 시부모를 하늘처럼 생각하고 모셔야 자녀들도 보고 따라한다. 따라서 자녀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처럼 양로원 시설이 필요 없는 사회다. 만약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다면 주위에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그 지역에서 살아남기가 어렵게 된다.
필리핀의 농촌생활 속에서 여성이 이고 지고 가는 삶의 현장을 보면서 우리네 고향집 어머니의 헌신적 모습이 생각난다. 사회가 아무리 풍요로워 진다하더라도 농촌이 갖고 있는 미풍양속이 살아 있는 그런 사회가 진정한 복지국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