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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섬사이, 바다를 겨울해가 채운다. 개도행 배 안에서
섬과 섬사이, 바다를 겨울해가 채운다. 개도행 배 안에서 ⓒ 이승열
돌산도 앞바다를 가득 메운 섣달 열나흘 달빛에서 밤새도록 은빛 파도가 소리를 냈다. 깡촌에서 태어나 처음 나간 도시 학교의 오래된 건물에서 하루종일 울렸던 종소리가 와이먼의 피아노곡 '은파'였다.

자취생의 외로움, 열여섯의 꿈, 세상에 대한 두려움, 은파는 내 열여섯살의 원형이었다. 그 은빛 달빛소리가 대숲에 이르면서 내는 소쇄한 바람소리, 그 소리가 만개한 붉은 동백꽃을 후.두.둑 후.두.둑 떨어뜨리고 있었다.

은빛바다와 숲과 동백꽃의 어울려 밤새도록 바다소리를 냈다. 바다 한가득 쏟아지는 달빛이 발길을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홍선배를 어젯밤 여수 터미날에서 배웅한 뒤 예정에 없던 하룻밤을 향일암 요사채에서 머물렀다.

여행은 풍경과 사람들의 체취로 기억된다

@BRI@새벽 4시 도량석 치는 소리에 잠을 깼다. 간절한 소망을 담은 기도객들의 수선거림이 먼저 날 끌어냈다. 이 새벽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정갈하게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칠흑 같은 어둠을 짚어 나가며 법당을 향하게 하는 저들의 간절한 염원은 무엇일까?

반야심경도 신묘장구 대다라니경도 암송할 줄 모르는 나는 그저 침묵하며 마음만 모은다. 중생의 염원을 바로 들어주는 관세음보살만을 읊조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 아침공양시간도 동이 틀 시간도 한참이나 남았다. 방안에 앉아 창문 사이로 태평양의 끝 수평선이 조금씩 선명해지며 멀리 남해섬의 금산이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낸다.

단 이틀간의 머묾인데도, 머물고 떠남이 무심한 일일 텐데도 공양주 보살들은 떠남을 무척 서운해했다. 12년째 공양간에 머물며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백팔배를 올리는 고참 공양주 보살은 오늘 거제의 집으로 휴가를 간다고 내가 떠나고 나면 바로 떠날 것이라고 했다.

밤 간식으로 누룽지를 밀어주던 골이 깊이 패인 보조 공양주 보살의 구릿빛 얼굴은 내 친정엄마를 자꾸 떠오르게 한다. 따스한 봄이 되면 엄마와 함께 이곳에 다시 와서 쪽빛 바다를 함께 보고픈데, 다리가 아픈 엄마가 돌산도의 가파른 계단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내가 머물렀던 풍경은 그곳의 햇살, 바람, 동백새의 지저귐과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기억된다. 풍경에 사람들의 체취가 보태져 비로소 완성된 여행의 기억은 가슴속에 차곡차곡 쟁여졌다가 세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모습의 내가 선실 유리창 안에 있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모습의 내가 선실 유리창 안에 있다 ⓒ 이승열
아침 햇살이 가득한 한려수도의 쪽빛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쪽빛 바다에 떠 있는 양식장의 부표들, 아침 햇살에 붉은빛 골을 드러내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어부들, 5분 이상의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 매서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시리게 하는데도 어부들의 손길은 멈춤이 없다.

거문도 대신 개도를 향하다

어젯밤 어둠이 감췄던 돌산도의 풍경을 스치면서 돌산대교를 건너 여수로 향한다. 진남관, 오동도, 거문도, 백도…. 내가 그리워했던 땅의 이름들이 거리 일상처럼 펼쳐진다.

매운 바람 때문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거문도행 배는 뜨지 않았다고 한다. 거문도에 들어가 오래된 등대와 하얀 절벽을 가진 옥색 바다를 만나는 것은 다음으로 기약했다.

오전 10시, 섬으로 떠나는 가장 빠른 배는 여수연안여객선 터미널을 출발해 개도를 거쳐 금오도를 돌아 나오는 배뿐이다. 어지간한 바람이 부는 날이 아니면 늘 배는 떠난다고 했다. 주민증이 없는 나를 위해 매표원은 승선권에 '유람'이라고 큰 글씨로 써 주며 혹 문제가 생기면 항해사 아저씨와 상의하라고 했다.

연안여객선 선장 경력 30년 남방술 선장님이 키를 잡고 개도 부두에 배를 정박시키고 있다
연안여객선 선장 경력 30년 남방술 선장님이 키를 잡고 개도 부두에 배를 정박시키고 있다 ⓒ 이승열
바다 속 등대, 남선장님이 정확한 명칭을 가르쳐주셨는데, 돌아선 순간 잊었다.
바다 속 등대, 남선장님이 정확한 명칭을 가르쳐주셨는데, 돌아선 순간 잊었다. ⓒ 이승열
개도까지의 배삯이 나 같은 외지인은 5900원, 도서민들은 정부의 보조로 1500원이라고 했다. 승객은 몇 되지 않았다. 모두들 선실에서 주말부터 몰아닥친 한파를 피하고 있었다.

우선 개도행 배표를 끊었지만 아직도 행선지를 정하지 못해 갈등 중인 내게 선장, 항해사, 개도 주민들의 의견이 다 달랐다. 선장님과 항해사 아저씨는 고작 한 시간 머무를 뿐인 개도에 뭐 볼 것이 있느냐고 그냥 배를 타고 금오도까지 가면서 한려수도의 수려한 바다 경치를 보는 쪽을 권했다.

개도 축사에 소 여물을 주러 가는 아저씨와 모전리 정관호 아저씨는 개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섬인지를 강조했다. 난 개도 주민들의 말을 따라 개도에서 배를 내리면서 금오도를 돌아 다시 이곳에 오전11시 40분에 들르는 배를 타기로 했다.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섬사람들

달리는 것이 신기했던 나를 개도 곳곳으로 안내한 정관호 아저씨의 트럭
달리는 것이 신기했던 나를 개도 곳곳으로 안내한 정관호 아저씨의 트럭 ⓒ 이승열
개도 선착장에 세워진 정관호 아저씨의 푸른색 트럭에 몸을 싣고 아저씨의 목적지 근처에서 내려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굽이굽이 개도 월항으로 가는 길은 꿈길처럼 아름다웠다. 아직도 생명을 다하지 않은 갈대의 하얀 흔들림, 길만 빼고 양옆에 펼쳐진 바다는 시린 쪽빛 물빛, 그 물이 키워내고 있는 미역과 전복 밭이다.

이곳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청정해역이라고 했다. 11시 40분에 나가는 배를 포기하고 오후 배를 탄다면 작은 배를 타고 전복 양식장에 가서 직접 전복 채취할 수 있다고 했다. 멸치 양식이 주업인 정관호 아저씨는 지금이 가장 전복이 맛날 때로 오후 배를 타기를 강력히 권했다.

자식 걱정을 하는 월항 할아버지와 노인의 말동무가 되어 드린 아저씨
자식 걱정을 하는 월항 할아버지와 노인의 말동무가 되어 드린 아저씨 ⓒ 이승열
가는 장구목 같은 곳에 축사 아저씨를 내려 드리고 털털거리는 트럭으로 개도항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월항에 닿았다. 쪽빛 하늘과 쪽빛 바다가 만난 지점에 돌담이 높게 쌓여 있었고, 파란색, 주황색, 초록색 대문과 지붕이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켜켜이 방파제를 쌓아 너른 태평양 바다가 마치 호수처럼 고요했다.

깡소주에 노란 단무지를 안주로 정관호 아저씨가 동네 할아버지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있는 사이 난 돌담 높은 골목 사이를 거닐었다. 전복배를 포기하고 오전에 섬을 떠나기로 결정한 나 때문에 아저씨가 갑자기 분주해진다. 아저씨는 뱃전에서 처음 만난 내게 자신의 동네인 모전자갈밭, 섬의 또 다른 끝 호령까지 데려가 주셨다.

"저그가 우리 동네인디 담에 꼭 한번 더 놀러 오드라구. 돈 아까우니께 민박하지 말구 기냥 찾아 오믄 돼."

개도 월한 키 높은 돌담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쓸쓸한 섬 골목
개도 월한 키 높은 돌담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쓸쓸한 섬 골목 ⓒ 이승열
쪽빛 바다, 쪽빛 담장, 쪽빛 하늘의 오징어 말리기, 개도 월항
쪽빛 바다, 쪽빛 담장, 쪽빛 하늘의 오징어 말리기, 개도 월항 ⓒ 이승열
오늘 처음 만난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낯선 이에게 난 이런 친절을 베풀어 준 적이 있던가? 아는 사람에게도 늘 인색하게 굴면서, 도시에서의 삶은 이런 섬과는 다르다고,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손해라는 굳은 믿음, 내 삶의 방식에 잠시 회의하나 이 섬을 떠나는 순간 이곳에서의 가슴 울림을 난 흔적도 없이 잊을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서로 아는척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은 이미 도시의 삶에 맞지 않는다고 위안하며 살 것이다.

아저씨와 작별하며 난 꼬깃꼬깃한 지폐를 손에 쥐어드렸다. 내가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돈이라는 게 좀 서글펐다. 하지만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하는지조차 너무 오랜 시간 잊고 살았다.

두 시간 전의 인연도 고향사람처럼 살갑다

떠나온 자리로 날 다시 데려줄 배가 개도에 정박하고 있다
떠나온 자리로 날 다시 데려줄 배가 개도에 정박하고 있다 ⓒ 이승열
멀리 미역 양식장 하얀 부표 사이로 나를 떠난 곳으로 데려다 줄 배가 들어오고 있다. 아까 월항 장구목에서 헤어진 소 여물, 한 시간 전에 헤어진 금오도를 돌아 나오는 선장님, 항해사님이 다시 반갑게 맞는다.

겨우 두 시간 전의 인연인데도 아주 오래 전에 헤어졌던 고향 사람을 대하듯 살갑고 따스하다. 뱃사람으로 37년, 연안여객선 선장으로 30년을 일한 남방술 선장님의 초대로 배 안에서 고봉밥을 대접받았다. 무를 넣어 빨갛게 만든 갈치조림에서 설설 김이 났다.

뱃길이 지나며 일으킨 하얀 파도가 배를 향해 돌진한다. 오랜 시간 바닷길에 배가 지나간 자욱이 새겨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다 문득 바다는 배가 지나간 자리, 그 출렁임을 기억할 것이다. 흔적조차 희미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바람소리에 문득, 꽃잎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찰나에 떠오르듯이….

갈치조림, 박대구이, 파래무침, 하얀 고봉밥, 선상에서의 식사
갈치조림, 박대구이, 파래무침, 하얀 고봉밥, 선상에서의 식사 ⓒ 이승열
거문도가 고향인 남 선장님의 노모가 고향을 지키고 있다고 혹 그 섬에 가게 될 일이 있거든 꼭 들러 민박을 하지 말고 어머니 집에서 머물고 오라는 바다 위의 초대를 받았다.

돌산대교 아래를 지나 배가 연안에 도착한다. 배를 내리기 전 난 선장님이 보이지 않는 항해실을 향해 목례한 뒤 진남관으로 향했다. 내가 섬에 다녀왔다는 것도, 그 바닷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났던 것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아득하게 과거 속으로 소멸됐다.

덧붙이는 글 | 전남 여수시 연안여객선 터미날에서 남쪽으로 약 21.5㎞, 뱃길로 1시간 걸립니다. 여수반도, 돌산도, 금오도, 고흥반도 등 주위에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어 덮을 개(蓋)를 써서 개도(蓋島)라고 부릅니다.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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