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버그 책을 번역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를 엄습한 첫 느낌은 두려움이었다. 스티븐 와인버그(74·Steven Weinberg·텍사스대), 그가 누구던가. 무엇보다 그는 내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standard model)을 만든 사람이다. 그 공로로 1979년 노벨상을 받았다.
1967년 발표한 논문 'A model of leptons(경입자에 대한 모형)'은 지금까지 무려 6100여회 인용돼 기초과학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중 하나로 꼽힌다. 현존하는 최고의 물리학자를 들라면, 네덜란드 유트레이트 대학의 트후프트(G.t Hooft), 미 프린스턴의 위튼(E. Witten)과 함께 와인버그가 포함된다.
와인버그는 또한 많은 명저를 남겼는데, 우주의 기원에 관한 대중서적인 <처음 3분간(The first 3 minutes)>을 포함해서 대학원생 필독서인 <중력과 우주론(Gravitation and cosmology)> 등이 유명하다. 내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나온 <양자장론(The quantum theory of fields)>은 입자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바이블'로 통한다. 요컨대, 지금 인류가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들여다보는 기본적인 틀거리를 제공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와인버그이다.
와인버그 저작들이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물리학자답지 않은 수려한 문장과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명쾌함 때문이다. 야사 하이페츠가 아직까지도 바이올리니스트들 사이에서 영원한 '강박관념'으로 남아 있다면, 와인버그 또한 물리학계 전체를 통틀어 그런 위치에 있지 않을까 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게 되면 세상을 보는 방법과 느낌이 사뭇 다르게 마련인데, 와인버그는 대체 어떤 심정으로, 어떤 기분으로 글을 썼는지 내가 짐작할 수 있을까? 내 두려움의 요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경지에 이른 거장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할까
@BRI@1993년에 나온 와인버그의 <최종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우선, '표면적으로' 이 책은 '초전도 초대형 충돌기'(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SSC) 건설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SSC는 1983년부터 계획된 프로젝트로서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초대형 입자 가속기이다.
올해 11월 가동되는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의 거대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LHC)가 사상 최대 규모인데 둘레 27km, 충돌하는 양성자 빔의 에너지는 양성자 질량의 1만4천배, 비용은 약 2조원에 달한다. 그런데 SSC는 그 둘레가 무려 84km, 충돌하는 양성자 빔 에너지가 양성자 질량의 4만배, 비용은 약 8조원으로 추정됐다.
이른바 '거대과학'(big science)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라 할 만하다. 와인버그는 이 프로젝트를 앞장서서 가장 열성적으로 옹호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러나 SSC는 1993년 미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폐기됐다.
이 책에서 와인버그는 왜 물리학자들이 그런 엄청난 기계를 만들고자 하는지, 그 '문명사'적 의의를 설파하고 있다. 자연의 근본법칙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여기 오기까지 어떤 여정들을 거쳐 왔는지 매우 상세하게 적고 있다.
특히 와인버그는 자연에 궁극의 법칙, 즉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그것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들을 원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이론체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와인버그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여타의 이론들 사이에는 매우 독특한 (중요성의 경중이 아닌) 위계질서가 존재하는데 한 이론이 다른 이론을 설명하는, 설명의 방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방향은 한 곳으로 일정하게 수렴하는 듯이 보이며 그 끝에 최종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이를 위해 와인버그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일반상대론, 끈 이론, 우주론은 물론 생물학, 철학, 인류학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특유의 박학다식함을 과시한다. 수식 하나 없이 소위 '말발'로만 그 방대한 내용을 소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 책이 유명해진 것은 이런 내용적 충실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와인버그의 입장은 줄곧 '환원주의'(reductionism)와 '실재론자'(realist)적 관점으로 일관하고 있다.
환원주의와 실재론자의 관점으로
환원주의란 앞서 말했던 이론들 간의 위계질서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모든 화학반응은 원칙적으로 양자역학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화학은 양자역학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실재론자들은 자연의 근본법칙들이 마치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철학과 종교에 대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맹공을 퍼붓는다. (이런 그가, 아무리 유대인이라고는 하지만 시온주의자라는 점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철학이 과학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사조의 탈을 쓰고 과학적 객관성을 위협하고 있다며 경계한다. 사실, 전체 12장 중에서 이처럼 논쟁적인 내용은 3장, 7장, 그리고 11장에만 거의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7장은 그 제목부터 '철학에 반(反)하여'(Against Philosophy)이다.
와인버그의 환원주의적 관점은 가히 '골수적'이라고 할 만하다. 나 또한 입자물리학자로서 와인버그의 충실한 학생일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어쨌든 입자물리학자들은 직업적 특성상 환원주의에 경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물리학 내부에서도 많은 다른 과학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여지가 많다. SSC가 폐기된 데에는 고체물리학계의 대부격인 필립 앤더슨(Philip Anderson)이 나서서 반대한 영향도 적지 않았는데 이는 단순히 다른 분야에 엄청난 자금이 쏠리는 것에 대한 배 아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는 과학자들은 소위 '창발'(創發·emerge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생명현상이 그렇다. 원자나 소립자 단위로 내려가면 생명이나 지능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들이 모여 분자를 이루고 단백질을 만들고 세포를 구성하고 유기체를 만들면,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지능도 생겨난다. 즉 복잡계(complex system)에서는 그 이하 단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새로운 '근본법칙'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SSC를 건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논쟁이 (의회 청문회에서도 숱하게) 진행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과학 자체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자리 잡고 있다. 입자물리학에서 주장하는 소립자들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복잡계의 여러 층위에서 동등한 수준의 '근본적인' 원리들이 존재한다면, 굳이 그 많은 돈을 SSC에만 부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SSC 문제가 일단락되고 난 후에는 이 책이 소위 '과학전쟁'(Science War)의 효시가 된 저작 중 하나로 유명해진다. 과학전쟁이란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된 서구 학계의 격렬한 논쟁을 의미한다. 핵심은 '과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이었다.
1990년대 초반 서구 학계가 벌인 격렬한 논쟁, 그 핵심은?
과학전쟁의 서전을 흔히 1992년 영국 런던대학의 월퍼트(L. Wolpert)의 <과학의 비자연적 본질(The unnatural nature of science)>과 와인버그의 이 책으로 잡고 있다.
이 반대편에는 '과학의 사회구성론' 혹은 '과학지식의 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SSK)으로 무장한 일단의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요지는 과학적 내용이 사회적 요인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토마스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paradigm)론이 물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와인버그는 과학적 내용이 SSK가 말하는 그런 식으로 결코 '구성'(constructing)되지 않는다며 맹렬히 반격한다.
과학전쟁은 이후 1996년의 '소칼의 날조'(Sokal's Hoax)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1997년에는 이른바 '와이즈(N, Wise) 사건'으로 이어졌다. 와인버그는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최근 소개된 <과학전쟁에서 평화를 찾아(Facing up)>는 이 와중에 그가 쓴 에세이들을 모아 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책을 번역한 분들은 고체 물리학을 전공하는 지인들인데, 그 옛날 술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던 말들을 역자후기에서 다시 보게 돼 반가웠다. 물론 그 의견들은 와인버그보다는 앤더슨에 가까운 편이다.
대학시절 과학철학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던 나로서는, 또한 지금은 태생적으로 환원주의자 혹은 실재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직 입자물리학자로서, 이 책을 대하는 입장이 참으로 묘할 따름이다. 이는 곧 나 자신의 더 깊은 성찰과 더 치열한 토론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이런 논의들이 활성화하지도 않았고 토론문화 또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책을 기획한 '사이언스 북스'의 노의성 팀장은 이런 우리의 척박한 풍토를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자는 생각으로 번역을 부탁했다. 어떤 면에서는 문명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논쟁들을 먼저 연구하고 소개해야 할 학계 사람으로서 이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중요하고 유명한 책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인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나 학계에서나 여전히 번역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아 보인다. 들인 노력에 비해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이유가 클 것이다. 나 또한 번역하느라 많은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러나 대가(大家)의 생각 언저리에 한동안 깊게 머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그 보상을 충분히 받은 느낌이다.
책은 올 8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사를 쓴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