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방송통신대 뒷길, 대학로에서는 외진 곳이라고 할 곳에 '갤러리 정미소'가 있습니다. 공연 전문잡지 <객석> 빌딩 안에 있습니다. 외벽에 설치극장 ‘정미소’의 공연 안내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예쁘장한 카페가 있는 이 건물 앞을 지나가기만 하다가, 어느 날 건물 안에 갤러리가 있는 걸 알고 과감히 들어가 보았습니다. 무언가가 그리웠거든요.
대형 유리문 너머 1층은 카페면서 공연장 '정미소'의 관객 대기실인 듯 했습니다. 지금 '정미소' 극장에는 '7인의 천사'라는 작품이 공연되고 있습니다. 불쑥 들어온 저를 보고 안내 데스크에 있는 분이 공연 보러 오셨냐고 합니다.
카페 이름이 ‘美소’입니다. 알고 보니 카페 겸 꽃집입니다. 사실 공연장 ‘정미소’나 갤러리 ‘정미소’는 정확히 말해 ‘정美소’입니다. 이 ‘美소’와 ‘정美소’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공간’, ‘웃는 얼굴’을 뜻합니다. 저는 쌀을 찧는 정미소(精米所)를 연상했습니다.
기다란 통탁자에 사방으로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탁자 위에는 촛불이 켜져 있구요.
카페 사방 벽에 사진이 걸려 있어 갤러리 올라가기 전에 사진 구경을 먼저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과 풍경을 찍은 사진입니다. 해맑은 아이들 얼굴이 클로즈업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아하! 그런데 사진작가의 이름이 낯이 익습니다. 사진작가 신미식입니다.(2월 28일까지 전시)
작년에 이 작가의 포토에세이를 사서 보았습니다.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느낌글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렇습니다. 책 제목이 <고맙습니다>입니다.
여행이 삶이 된 사내가 거친 길 속에서 만난 푸근한 사람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책 안에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책 속에서 작가는 “사진은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나로 되돌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내가 잊고 지내는 작고 소중한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순간의 선택들…”이라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전시된 사진들 속에도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2층에 있는 갤러리로 올라갑니다. 갤러리 ‘정미소’는 특이한 내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곳을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내부 한 벽이 마감질이 생략되어 있어 쌓여진 벽돌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공사하다 만 것처럼요. 창은 더 특이하게 철판으로 임시방편인 듯이 막아놓았습니다. 틈새로 외부 빛이 새어들어올 뿐입니다. 창을 만들고 창을 가려버렸습니다. 무슨 의도일까요.
천장을 보면 또한 놀랍니다. 숨겨져야 할 배관 시설들 일체가 노출되어 있습니다. 물 내려오는 소리가 쏴아 하고 들리기까지 합니다. 숨어 있어야 할 것은 노출시키고 뚫려 있어야 할 곳은 막혀 있습니다.
갤러리 사무실도 벽 속에 숨어 있습니다. 갤러리 입구 쪽 벽면 뒤쪽의 삼각형의 공간에 큐레이터 두 분이 숨어서(?)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방문객이 왔는지는 발소리를 듣고서야 알 수 있습니다. 그쪽을 살짝 엿보듯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했습니다. 진한 커피도 주고 귤도 주네요.
갤러리 바닥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유리로 되어 있거든요. 유리판 너머로 1층 카페가 바로 내려다보입니다. 시각적으로(?) 막혀 있어야 할 곳이 뚫려 있습니다. 저 너머로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 얌전히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위를 머뭇거리다 머뭇거리다 걸어보았습니다. 성서 속에 베드로가 물 위를 겁을 내며 걸어가듯 떨리는 심정으로 걸어보았습니다. 다행히 유리판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유리바닥은 벽체 대신 유리벽으로 위치하고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역할 바꾸기를 하고 있네요.
갤러리 ‘정미소’의 외관은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시작됩니다. 사진을 보니 그 안은 그야말로 짓다 만 건물처럼, 시멘트 사이로 철근이 튀어나와 있는 구조물 밑에 관객들 자리가 있었습니다.
2002넌 <객석>의 윤석화님과 건축가 장윤규님이 이런 공간을 구상했습니다. ‘버려진 것들을 삭제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고, ‘아크로폴리스의 감동은 그 곳이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폐허의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자라나는 공간으로서 시간의 공존을 꾀하는’ 의도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이곳입니다.
2층 갤러리에서 유리 바닥으로 1층 창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창을 철판으로 막아놓았어도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상상력이 이 건물을 지배합니다. ‘건물 자체가 작품이고 극장과 갤러리가 천장이자 바닥인 투명한 유리로 소통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 정덕영이라는 분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2월 15일까지). 넓은 여백 위로 추상적인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은 캔버스 위 아래로 넘쳐나기도 합니다. 때론 붓과 돌, 나무 기둥이 오브제가 되어 그림 속에 얌전히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이에게는 의문 부호가 연달아 나는, 제게는 그래서 어려운 그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화가가 의도한 바일지도 모릅니다.
그 화가 분과 1층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저를 최대한 배려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그림들은 이 분의 몇십 년 인생이 들어 있습니다. 가장 자유로운 시각에서 자유로이 선택한 미술세계였습니다.
화가는 비회화 속에서 회화를 추구한다고 했습니다. 회화 아닌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화가의 '비회화의 회화'의 의도와 이곳의 '비역할, 반역할'의 이미지가 어울립니다.
미술가들은 참 자유로운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그림 그리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한 화가의 삶과 경험과 앎, 생각 속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들이 구상되고 화가의 손끝에서 붓을 거쳐서 캔버스에 닿습니다.
형식의 파괴를 하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학문들끼리 경계를 넘나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만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 특정한 형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니 반형식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 비회화를 추구하는 것도 그것 때문 아닐까요. 그런데 화가는 그렇게 하다가 다시 회화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회화도 삶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객석 빌딩 들어가기 전에 살짝 비가 왔습니다. 객석 빌딩을 나오고 한참 후 저녁 무렵이 되면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가뭄에 단비였습니다. 오랜만에 온 비라 특별하기도 했던 일상입니다. 우산을 쓰고 잠시 걸어보았습니다. 퇴근 무렵의 분주한 시간 속에 환히 불 켜진 건물 모습이 정겹습니다. 불빛에 반사된 외줄 빗줄기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건물도 반갑고, 오랜만에 내리는 비도 반갑습니다. 가끔 내 삶이 폐허 같다고 느낄 때라도 그 속에서도 이런 비 덕분에 꽃들이 자라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힘이 나질 않을까요. 가끔 내 마음밭 속에 꽃씨를 뿌리는 작은 노력만 한다면요, 그런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