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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 대장간'이라고 해야하나? 재래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안준철
제가 사는 순천은 두 곳에서 오일장이 섭니다. 2일과 7일이 아랫시장 오일장이고 5일과 10일이 웃시장의 오일장입니다. 아랫시장을 아랫장이라고 하고 웃시장을 웃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17일)은 아랫시장, 곧 아랫장에서 오일장이 열리는 날입니다.

오늘 아내를 따라 아랫장을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아랫장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워낙 걷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저와 아내 모두 등에 배낭을 하나씩 짊어지고 아침 10시경에 집을 나섰습니다. 설대목이라 그런지 비가 조금씩 뿌려대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을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장에 사람들이 붐비면 어쩐지 기분이 좋습니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면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형편이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물건을 사러 장에 오는 사람이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즘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다보니 그런 마음을 먹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국내산 가오리를 파는 할머니
ⓒ 안준철
아내는 물건값을 흥정하기 전에 저를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고 당부하곤 합니다. 아내가 물건을 고르고 물건 값을 흥정하는 동안 저는 서너 발짝 뒤에서 도둑질이라도 하듯 몰래 몰래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사진을 찍는 이유는 뭐랄까요, 오일장과 설대목이 만난 재래시장의 모습을 담았다가 기사를 쓸 때 사용하기 위해서라면 솔직한 대답이 될 것 같은데, 그것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그러기에는 제 솜씨가 너무 형편이 없지만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그런 느낌이 저에게 왔습니다. 그때도 아내와 함께 재래시장을 산책삼아 걷고 있었는데 한 순간 제 눈에 들어온 한 폭의 풍경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그 풍경이라고 해보았자 장에서 물건을 파시는 세 분 할머니가 전부였습니다.

▲ 시장 풍경
ⓒ 안준철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노랫말처럼 예쁠 것도 고울 것도 없는 너무도 평범한 할머니들이었습니다. 세 분 모두 분위기가 엇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조금은 못나 보이고, 조금은 기형적이기도 하고, 조금은 누추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제 시선을 빼앗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세월을 사신 분만이 지어보일 수 있는 그런 표정이라고나 할까요?

오늘도 저는 그런 아름다움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그것을 사진기에 담지는 못했습니다. 사진기술도 기술이지만 장사하시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몰래 찍는 것은 몰라도 사전 양해도 없이 섬세한 표정까지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아내는 물건 흥정을 다 끝냈는지 저를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자유롭게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오일장이 설대목에 열려서 조금 나으신가요?"
"아무래도 그러지라."
"만약 내일이 장날이었으면 손님이 더 없을 뻔했네요."
"그러지라. 내일이 설인데, 아무렴 그러지라."
"그럼 많이 파세요."

▲ 담소를 나누고 있는 시장 사람들
ⓒ 안준철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몇 발짝 걷기가 무섭게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이거 다 얼마치야?"
"홍합이 2천원이고 꼬막이 3천원이야."
"야, 무지 싸다. 그렇지?"
"그럼. 오늘 설대목이라 더 비쌀 줄 알았는데 아주 싸네."

어시장을 돌면서 홍합과 꼬막 말고도 가오리 4마리와 아구 2마리를 더 샀습니다. 아구는 보면 볼수록 참 못생겼습니다. 하지만 맛은 일품이지요.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우리에게 먹거리가 되어주는 것들에게 참 많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신세를 질지언정 고마운 마음은 가져야 할텐데 그렇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 자신부터 그렇지요. 아구찜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아구를 볼 때마다 못생겼다고 흉이나 보았으니 말입니다.

▲ 시장 풍경
ⓒ 안준철
아내는 싼거리를 하다보니 재미가 붙었는지 몇 군데를 더 기웃거리다가 1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장보기를 끝냈습니다. 그 사이 불어난 짐을 두 개의 배낭에 우겨넣고 시장을 빠져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갈 때도 걸어서 갈 생각이었는데 아내가 맨 등짐이 무겁게 느껴져서 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횡단보도를 건널 때 아내가 서운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삼하고 낙지도 사고 싶었는데. 나 해삼하고 낙지 좋아하잖아."
"그럼 사지 그랬어."
"당신 좋아하는 거 사다보니 돈이 부족해서 그랬지 뭐."
"나한테 돈 있어. 다시 갈까?"
"다음에 사지 뭐. 그 대신 나 붕어빵 사줘."

▲ 시장 풍경
ⓒ 안준철
바로 눈앞에 붕어빵을 파는 곳이 있었습니다. 우린 그곳으로 들어가 붕어빵 다섯 개를 먹고 할머니가 서비스로 주시는 따듯한 국물도 함께 마셨습니다. 저는 꼬막을 파시던 할머니에게 던졌던 말을 붕어빵을 파시는 할머니에게도 다시 던져보았습니다. 그 대답도 같으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설날이라 다들 바빠서 그런지 사람들이 장만 보고 그냥 가네요."
"아, 그렇겠네요. 할머니도 오일장에만 장사하세요?"
"여기 아랫장하고 웃장하고 두 군데서 하지라."
"그럼, 열흘에 네 번 장사하시네요."
"그러지라."

저는 혹시라도 실례가 될지 몰라 몇 번 주저하다가 잠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랫장과 웃장이 비슷한가요?"
"여기 아랫장이 좀 낫지라."
"그럼 여기서는 하루에 한 십 만원 정도 파시나요?"
"그 정도 되지라. 어느 때는 이삼만 원 더 팔 때도 있고, 어느 때는 이 삼만 원 덜 팔 때도 있고."

"하신 지는 오래 되셨어요?"
"오래 됐지라."
"몇 십 년 하신 거예요?"
"그 정도는 아니고 한 팔년쯤했지라. 아주 젊었을 때 잠깐 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고라."
"그때 경험이 있으셔서 하시게 된 거네요."
"그러지라."

▲ 시장 건너편 거리에서 붕어빵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할머니,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안준철
잠시 후 우리는 그곳을 나왔습니다. 붕어빵 다섯 개에 따끈한 국물을 맛있게 먹고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드리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올 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더니 마치 메아리처럼 이런 말이 들려왔습니다.

"새해 복 많이들 많으시구려!"

아, 오늘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 모든 분들께 큰 절을 올리고 싶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 자신의 소중한 삶의 주인공이 되시는, 또한 서로 서로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분들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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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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