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BRI@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서 "아빠 왔다" 하는데, 9살짜리 반석이와 6살짜리 하늘이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들은 척 만 척이다. 2살짜리 진석이만 뒤뚱 걸음으로 아빠한테 달려오다가 아빠 뒤에 서 있는 낯선 아저씨(기자)를 보고는 주춤하더니 엄마 뒤로 숨는다. 한국의 여느 집과 별다르지 않은 가장의 퇴근 시간 풍경이다. 웅얼거리며 반갑게 아빠에게 달려드는 진석이의 유난히 큰 눈, 까만 얼굴, 곱슬머리가 한 가지 다른 점이랄까.
진석이는 2005년 성탄절을 이틀 앞둔 12월 23일 이현호 목사(38) 집에 찾아온 작은아기다. 마치 예수가 아기로 이 땅에 온 것처럼, 진석이도 태어난 지 3개월 된 갓난아기로 이 집에 왔다. 이제 17개월 된 진석이는 기저귀를 찬 채 뒤뚱거리며 집구석을 난장판으로 만들지만, 자기와 피부색이 다른 엄마·아빠·형·누나와 한 가족이 되어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진석이(미국 이름은 Angel)의 친엄마는 20대 중반의 흑인 대학생. 한순간의 실수로 임신은 했지만 생명을 버릴 수는 없어서 입양기관에 아기를 맡겼다. 이현호 목사 부부는 2003년에 입양을 결심했다. 수개월 걸리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진석이와 이 목사 가족이 연결되었고, 2005년 말에 진석이는 이 목사의 식구가 되었다. 진석이의 친엄마는 지금도 가끔 연락해 아이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단다. 집에 놀러오라고 권유하지만, 아이를 만나면 죄책감이 더 클 것 같아서 그런지 직접 만나려고 하지는 않고 안부만 묻는다고 한다.
왜 흑인 아이를 입양했냐고?
한국 여성과 흑인이 결혼해 혼혈아를 낳은 경우는 많지만 한국인이 흑인을 입양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다. 기자가 몇 시간 동안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입양과 관련한 정보를 알 만한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이에 딱 맞는 답을 구하지 못했다.
그럼 이 목사 부부는 왜 흑인 아이를 입양했을까. 다분히 인종 차별적인 질문이겠지만, 우리네 인식의 현주소는 이런 질문을 당연하게 만들고 있다. 이 목사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이 흑인 또는 진석이를 원한 것이 아니라 진석이의 생모가 이 목사네를 선택한 것이다. 한국의 입양 제도와 미국의 입양 제도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생모는 진석이를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게 하고 싶었으며, 이 목사 가족의 다복한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백인 가정에 아이를 맡기기로 했는데, 진석이 몸에 작은 이상이 있어서 수술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신청자는 이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목사네는 흑인 아이를 받아들이는 데 고민이 없었을까. 너무 쉽게 "그런 건 없었다"고 대답한다. 뉴욕의 경우 입양기관에 맡겨진 아이의 상당수가 흑인이기 때문에 흑인이 입양될 가능성이 있지만, 흑인 부모가 아시아인에게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오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시아인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히스패닉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목사 내외가 인종에 대한 거부감을 별로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그들의 살아온 과정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99년 미국에 이민 오자마자 흑인들이 많이 사는 브롱스에서 캄보디아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아동부 사역을 했다. 지금도 캄보디아 교회 출신 청년들과 목회하고 있다. 두 아이도 태어나자마자 흑인과 히스패닉들과 자연스레 어울렸기 때문에 인종에 대한 거부감은 아예 없었다. 지금 사는 뉴저지 티넥이라는 곳도 흑인 동네이다.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보육원에서 1년 넘게 봉사한 적이 있고, 미국에 와서도 병원에서 원목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장애인 선교 단체인 뉴저지밀알선교단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다. 내년에는 중앙아시아와 같은 이슬람 국가에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내 김성덕씨가 미국 시민권자인데도 본인은 시민권을 갖지 않은 이유는 미국 시민권이 이슬람 국가에서 선교하는 데 도움이 안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육아 재미에 푹 빠진 목사 부부
목사로서 성경에 대한 신념이 그의 실천을 뒷받침한다. 가령,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라는 구절이나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하고 외쳤습니다"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초월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 인종적 편견을 갖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또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지금 이 시대에 과부가 누군가. 미혼모를 말하는 것 아닌가. 그 미혼모의 아이는 고아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달 따라 구름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한량이 아니라 바로 약한 외국인, 힘없는 소수민족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 부부의 이런 신념은 인종에 대한 차별 없이 어떠한 아이든 입양하겠다는 의지로 이어갔다. 당시 사회복지사가 "흑인이라도 상관없냐"고 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것은, 이왕이면 다인종 커뮤니티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다소 거창한 마음도 속으로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내 아기이고 부모일 뿐이다. 밤중에 아기가 자다 깨서 보채면 우유를 먹여주고 기저귀 갈아주느라 바쁘다. 첫째와 둘째 애는 미국에 적응하느라 키우는 재미를 별로 못 느꼈는데, 진석이 키우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란다. '커뮤니티의 가교' 같은 엄청난 포부가 무색하게 육아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한인들의 싸늘한 시선 "왜 하필 흑인이냐"
그러나 어려움은 딴 데 있었다. 바로 주위의 싸한 시선이다. 특히 한인타운에 나가면 곱지 않은 눈길을 견뎌야만 한다. 엄마와 진석이 둘만 있을 때는 남편이 흑인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이런 오해는 차라리 괜찮다. "한국 고아들도 많은데 왜 하필 흑인이냐"는 노골적인 핀잔을 듣고 아내는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들을 취재하는 것에 조심스러워했다.
이제는 바뀔 때도 된 것 같은데, 좀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의 편견이 이들 부부의 마음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굳이 남들에게 숨길 것도 없고, 숨기려야 숨겨지지도 않는 일이기 때문에 주위 반응을 담담히 받아들이려 하지만, 상처는 쉬 지워지지 않는다. 감사한 일은 입양을 한 한참 뒤에야 이 소식을 들은 양가 부모님들이 처음에는 황당해 하다가 지금은 진석이를 너무 보고 싶어하고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또 입양하면 마치 정부에서 큰 혜택이라도 받는 것처럼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혜택은 없다. 지금은 교회 교인 중에 의사가 있어서 진석이의 자잘한 건강 문제는 챙겨주고 있지만, 비싼 Health Insurance(건강보험)가 아직 없기 때문에 진석이 수술도 당장은 못 시키고 있다.
이 목사 내외는 진석이를 진짜 내 식구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도 함께 하고 있다. 진석이가 18세가 되면 자기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고, 부모 선택권도 갖게 된다. "진석이가 친엄마를 원하면 얼마든지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았을 뿐이니까요. 그것은 진석이뿐만 아니라 반석이와 하늘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주뉴스앤조이>(www.newsnjoy.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