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적으로 거래되고 있는 상품 가운데 원유 다음으로 많이 거래되는 것이 커피다.
흔히 커피하면 생산지로 브라질을, 최대 소비국으로 스타벅스와 머그컵의 미국을 연상하지만 실제 커피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발견되어 아랍을 거쳐 전파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에티오피아에서 600여년 전 최초 발견된 커피는 당시 교역의 중심 예멘을 통해 인근 아랍 국가로 수출되기 시작되었고 이후 터키와 이란 등지로 수출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가화(Gahwah) 혹은 카화(Qahwah)로 불리우던 당시의 커피는 곧이어 사막 민족 베두윈들이 즐겨마시는 연한 커피 '가화 사드(Plain)'와 터키 사람들이 즐겨마시는 진한 커피 '가화 아라비아(=터키식 커피)'의 두 종류로 나뉘어 발전된다.
아랍어로 커피를 의미하는 가화가 'w' 발음이 없는 터키로 들어가며 카베(Kahve)로 불리다가 나중에 카페(Cafe), 커피(Coffee)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당시 수출항으로 명성을 떨쳤던 알 무카(Al Mukhaa) 항구의 이름에서 모카(Mocha) 커피의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되어 예멘에서 수출되기 시작한지 200여년이 지나게 되자 차차 커피의 명성이 유럽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커피 종자를 몰래 훔쳐간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기후 조건이 비슷한 인도네시아에서 대량생산이 시작되자 예멘의 독점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영제국은 곧이어 나이지리아와 자메이카 등지로 재배지를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커피의 전래 과정이다.
커피 권하는 사회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같은 영화를 통해 아랍을 간접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아랍하면 생각나는 것'을 들어보라면 사막을 배경으로 삼아 천막을 치고 이동하며 살아가는 베두윈 민족을 떠올린다.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는 사막을 지나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천막의 모습이 보이면 더위에 지친 나그네는 물이라도 한 잔 얻어마시고 지친 낙타와 함께 쉬고갈 요량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그 정경이 다름아닌 베두인 생활이 아니던가.
더위를 피해 헐떡거리며 천막 속으로 들어온 나그네를 위해 한 잔의 차와 더불어 오아시스에서 길어온 시원한 냉수 한 잔을 준비하는 것 만큼 더 고마운 선물이 또 무엇이 있을까.
매일 만나는 사람인데도 만날 때마다 몇 차례에 걸쳐 서로간의 뺨을 부비고 한참에 걸쳐 유일신 알라로부터 시작해 가족의 안부까지 장황하게 인사말을 교환하는 풍습도 다 따지고 보면 이런 황량한 사막에서의 반가운 만남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랍을 여행하며 가정 초대를 받거나 비즈니스 출장을 위해 아랍 회사의 사무실을 방문해 보면 으레 권하는 차가 사막 한 가운데서 대접받던 바로 그 베두윈식 커피와 시원한 물 한 잔이다.
조그만 간장 종지 여러 개를 포개어 들고 들어온 사환이 따라주는 찻 잔을 잠시 들고 있노라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사환의 모습에 영 신경이 쓰인다. 혹, 내가 마신 잔을 아예 챙겨서 나가려고 그러나 싶어 친절하게 '원샷'으로 마신 뒤 잔을 건네주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한 잔 가득 따른다.
다 마신 빈잔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 "나는 더 이상 안 마실거야"라는 단호한 신호를 보여주지 않는 한 사환의 차 공세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아랍은 사막 한 가운데서 더불어 살아가는 차 권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내실에 들어서면 또 "무얼 마실 건가요?"
대기실에서 이미 한 두 차례 베두윈식 커피 '가화 사드'를 마무리짓고 내실로 안내되면 이 번에는 사환이 정색을 하며 무엇을 마실 것인지 묻는다. 메뉴는 대략 가화 아라비아(터키식 커피), 아메리칸 커피 아니면 민트가 들어가는 향긋한 차 종류다.
매일 마시는 아메리칸 커피 대신 가화 아라비아를 주문하면 사환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져나옴을 눈치챌 수 있다. 아랍이 원조인 가화를 주문해 준데 대한 고마움도 그러하지만 그 커피가 얼마나 쓴지 한 번 마셔보라는 치기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터키인들이 주로 마시는 가화 아라비아는 아예 이름도 터키식 커피(Turkish Coffee)로 바뀌었다. 조그만 종지의 절반 이상을 커피 가루로 채우고 그 위에 살짝 물을 부은 듯 보이는 터키식 커피는 웬만큼 속이 편하지 않으면 한 모금 마신 뒤 곧장 토할 정도로 진하고 쓰다.
신부를 데려가려면 지참금 대신 요구하는 것이 '커피를 충분히 마시게 해 주는 능력'이라고 할 정도로 터키 사람들의 가화 아라비아에 대한 사랑은 남 다른데 오늘날 이 터키식 커피는 터키와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 아랍 전역, 아프리카 북동부 국가에서 가장 즐겨마시는 음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862 --> 998 --> 1125
암호처럼 연결된 위의 세 숫자는 지난 04년부터 작년까지 3년간 두바이에 소재한 카페가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매년 150개 정도가 늘어났으니 이틀에 하나 꼴로 시내 요지에 카페가 생겼다.
사방 60㎞의 두바이 면적을 단순 대입해 보더라도 매 3㎢당 카페가 하나씩인 셈인데 아부다비와 이어지는 상당 부분 사막과, 버젓한 건물 하나 없이 사막 언저리에 몰려있는 집성촌을 제외하면 단위 면적에 대한 카페의 숫자는 훌쩍 올라간다.
실제 아부다비에서 두바이로 들어가는 초입 세이크 자예드 거리는 하드록 카페를 출발점으로 양편으로 늘어선 고층 건물 지상층에 이름만 들어도 쉽사리 알 수 있는 세계적 카페들이 불과 몇 미터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두바이, 아부다비는 물론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사우디, 쿠웨이트에서도 사정은 별반 틀릴 것이 없다. 사막과 천막이 도심과 고층 건물로 바뀌고 낙타가 자동차로 대체되었을 뿐 사막을 지나 천막 앞에 낙타를 세우듯 그렇게 큰 길가에 승용차를 세우고 먼길을 달려온 나그네가 주인을 찾듯 그렇게 서둘러 카페로 들어간다.
아랍식 카페는 베두윈의 천막을 그대로 옮겨놓은 기능을 한다.
주인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천막 입구의 대기실 기능 공간이 있는가 하면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눌 때 반드시 필요한 물담배 즉 시샤를 피울 수 있는 공간도 반드시 건물 외부에 마련해 두고 있다. 웬만한 식당에는 담배 피우는 공간이 따로 없으니 아랍인들은 카페에서 아예 간단한 식사도 대부분 해결한다.
산책을 할 공간도 별도로 없고 동네 뒷산이나 마을 앞 개울도 존재하지 않은 사막 한 가운데, 한 잔 소주에 지글지글 맛나게 익어가는 삼겹살 한 젓가락도 기대할 수 없는 콘크리트 천지 아랍의 도시에서 대중들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 카페이다 보니 그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우디 국왕과 마주 앉아 커피 마시는 푸틴 대통령
지난주 사우디를 방문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압둘라 사우디 국왕과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 장면이 BBC를 통해 방영되었다. 간장 종지 처럼 생긴 찻잔을 들고 조금씩 얼굴을 찌푸리며 마시는 모습을 보니 가화 아라비아 즉 터키식 커피를 마시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랍에서 퍼져나간 가화가 커피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미국발로 아랍 시장을 호령한지도 제법되었다. 구소련 공화국의 붕괴로 중동내 세력간 균형이 온통 미국과 이스라엘에 편향된 가운데 푸틴 대통령의 이번 사우디 방문과 커피 대신 가화를 마시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남다르다.
러시아의 중동내 정치, 군사적 위상이 높아져 다시 미국과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하는 대부분의 아랍인들에게 가화 사드나 가화 아라비아의 미국식 커피에 대한 저항은 총이나 칼로서 하는 저항 만큼이나 그 의미가 지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