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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평생 걱정거리를 달고 사시는 엄니에게 '행복한 걱정거리' 하나를 보태 드렸습니다.
"애비가 많이 힘든 개벼, 살이 많이 빠졌어…."
"아이구 걱정 마세요 어머니! 애비는 오히려 좋기만 하다는데요."
"그래두 그렇지 살이 많이 빠졌구먼."
"허참, 엄니두 자꾸만 그러시네, 나는 몸이 개벼워서 날아갈 것 같이 너무 좋구만…."
여름 내내 아내가 만들어준 고무줄 달린 바지나 끈으로 묶는 한복형 바지를 입고 다니다가 혁대가 필요한 골덴바지를 입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큰 주먹이 들랑날랑 할 정도로 허리춤이 헐렁해졌던 것입니다.
1년에 한 번쯤 올라갈까 말까하는 체중계에 몸을 실어 보았습니다. 1년 전에 비해 몸무게가 무려 11킬로그램이나 빠져 있었습니다. 돼지고기로 치자면 스무 근 가까이 빠져나간 셈이었지요.
"농사일이 많이 힘든 모냥이로구나, 그냥 방송 글이나 쓰지, 뭔 놈의 농사를 짓는다구."
"남들은 돈 내고 헬스클럽 다니면서 뱃살을 뺀다는디, 얼마나 좋아요, 밭 갈다가 자동으로 똥배까정 빠져나가구, 거기다 야채 장사해서 돈까지 벌었잖유."
"그게 무슨 돈이 된다구, 살이 너무 많이 빠졌다니께."
"갈비씨였던 어렸을 때 생각 해봐요, 그때 비하믄 완전 배불뚝이 사장이 다 됐구만."
"그게 아니라두 자꾸 그러네, 얼굴도 홀쭉해졌잖어."
팔순을 앞둔 엄니는 뱃살에 허연 턱수염까지 늘어나고 있는 오십 줄을 앞둔 자식 걱정을 쉽게 놓지 못했습니다.
중년의 자식이 된 나는 엄니 걱정을 외면하고 기억 저편에 빼빼 말라 있던 어린 나를 떠올렸습니다. 그랬습니다. 어렸을 적에 내 별명은 '갈비씨'였습니다. 웃통을 벗으면 갈빗대가 보일 정도로 빼빼 말라 있었습니다.
엄니는 도무지 살이 붙지 않는 어린 내게 늘 그랬습니다.
"이 담에 크면 돈 많이 벌어서 배 사장이 돼야 혀."
"배 사장은 왜?"
"남자는 배가 나와야 혀, 배 사장이 되면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을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두 맘대루 다할 수 있고."
먹을 것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참외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참외는 허리띠 풀어 재끼고 맘껏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먹을거리였습니다.
배 사장을 꿈꾸었던 나는 배가 불룩하도록 참외를 먹었습니다. 배꼽참외처럼 불룩해진 배때기에 참외 씨 몇 개가 달라붙을 정도로 먹고 또 먹었습니다. 갈비씨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참외뿐만이 아니라 온갖 먹을 것을 냉장고에 잔뜩 쌓아 놓고 실컷 먹을 수 있다는 '배불뚝이 사장'의 꿈을 꾸었습니다.
뱃살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불룩한 배를 내놓고 회전의자에 앉아 거드름 피우는 배불뚝이 사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회생활을 했지만 아랫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진 것 없이 결혼하여 도시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식솔이 늘어나는 만큼 컴퓨터 자판을 더 많이 두들겨야 했습니다. 밤낮으로 일했는데도 뱃살은 피둥피둥 늘어만 갔습니다. 그렇게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아랫배가 돼지 비곗살처럼 두툼하게 자리를 잡아갔고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뱃살은 도무지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배불뚝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내 뱃살은 대한민국의 경제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1960년생인 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빼빼 마른 갈비씨였고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70㎏에 가까운 체중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80㎏을 육박했고 30대 후반부터는 줄곧 85㎏ 이상의 체중을 유지해 왔습니다.
땅 한 평 가진 게 없었지만 '배불뚝이의 꿈'을 충실히 이뤄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헛살이었습니다. 제 몸을 망가뜨리는 비곗살에 불과했습니다.
한번 나온 뱃살은 쉽게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들어와 산을 옆구리에 끼고 밥 먹듯이 산행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시골에 들어와서도 틈틈이 컴퓨터 앞에 앉아 돈벌이를 해야 했으니까요.
10여 년 동안 아랫배를 사수해 온 비곗살이 눈에 띄게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텃밭 수준의 농사를 생계유지 형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한 3년 전부터였습니다.
사오십 평의 텃밭을 일굴 때는 그저 땀 몇 방울로 족했지만 자급자족을 위한 첫 걸음인 천 평의 밭농사를 시작하고부터는 땀을 바가지로 쏟아내야 했습니다. 천 평 중에 야채를 심은 오백 평 가까운 밭은 기계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완전 자연농법으로 지었습니다.
거름을 직접 만들고 농약은 효소로 대신했습니다. 잡초는 손으로 일일이 뽑아줬습니다. 풀을 뽑다 보면 한여름이 속절없이 지나간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하지만 죽어라 농사일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천 평 농사일로는 네 식구가 먹고 살기 힘들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일을 병행했습니다. 그 일이 힘들면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밭은 컴퓨터 앞에서의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땀 흘리는 휴식처'였습니다. 밭은 사람들보다는 짐승들 발자국이 더 많이 찾아 드는 깊은 산속 암자나 다름없습니다.
하루에 두 차례씩 땀으로 샤워를 했지만 좀 더 많이 먹겠다고 농사를 지은 것이 아니라 먹을 만치 먹고 살겠다는 마음자리로 지은 농사였기에 뱃속 편했습니다. 뱃살은 그 속편한 시간들 사이에서 시나브로 빠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일이었습니다. 엄니가 환하게 웃으며 그러십니다.
"요즘 농사일이 없어 그런지 애비 얼굴에 살이 좀 붙었구나, 뱃살도 붙은 거 같구, 이렇게 보기가 좋은 걸."
"어이구 엄니는 참, 몸이 무거워 죽겠구먼."
겨울에는 농사일이 없습니다. 겨우내 컴퓨터 앞에 앉아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고 있다 보니 다시 뱃살이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체중이 5㎏이나 늘었습니다.
기분 좋게 온몸으로 땀을 흘리게 되면 때때로 배가 고픕니다. 먹는 시간이 일정해지고 소화도 잘 됩니다. 새참까지 먹어도 비곗살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땀 흘리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잔머리 굴리는 일을 하게 되면 배가 고픈지 어쩌지도 모르게 때를 놓치기 십상입니다.
소화도 쉽게 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뱃살이 나옵니다. 뱃살은 몸과 마음에 독이 됩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겨우내 뱃살을 늘려왔던 것입니다.
아직 밭갈이에 이른 봄, 밭으로 나섰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찢겨진 비닐하우스가 새삼스럽게 눈에 잡혀 왔습니다. 바위에 앉아 찬 숨을 고르며 밭을 두르고 있는 산, 거기 늘씬한 나무들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나무들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나처럼 많이 먹느니 적게 먹느니, 욕심이 많으니 적으니 주절거리지도 않습니다. 살이 찌거나 빠지지도 않습니다. 키가 크는 만큼 자연스럽게 살집이 오를 뿐입니다. 자연이 주는 대로 받아먹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니 곧게 자란 나무는 곧게 자란 대로 비틀어진 나무는 비틀어진 대로 나무 그 자체로 완벽해 보입니다. 겨울잠을 자고 있는 듯 고요해 보이지만 겨울잠을 자는 게 아닙니다. 내가 겨우 내내 땀 흘리지 않고 잔머리를 굴리며 좋지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을 때 나무는 숲의 일부가 되어 끊임없이 좋은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생태전문 잡지 <자연과 생태>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