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합의를 계기로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북아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품고 있는 역사적 기회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두 합의를 통해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북아에도 20세기와는 '다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하늘 아래에서 공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미국의 부시 행정부 사이의 모순관계가 지난 6년간의 격렬한 충돌을 딛고 관계 개선의 문턱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수적인 부시 행정부의 임기 내에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큰 틀이 마련되면, 이를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가 제동을 걸고 나설 가능성도 낮고, 2008년 11월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북미간의 합의가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이는 1994년 제네바 합의 직후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하면서 의회의 제동에 직면했던 것이나, 2000년 북미관계 정상화 문턱에서 부시의 당선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중단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정치적 환경이 미국 내에서 조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년 전 부시 행정부의 등장이 6.15 남북 공동선언과 북미 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정(正)의 시대를 반(反)의 시대로 되돌린 계기였다면, 지난 6년간 표출된 부시 대북정책의 모순은 역설적으로 한반도의 합(合)의 시대를 열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북포용정책은 합(合)의 시대를 열어갈 토대
@BRI@그러나 한반도 문제의 정·반·합의 변증법은 보다 거시적인 통찰과 전망을 요구한다. 우선 남북관계 차원이다. 94년 제네바 합의가 부여한 합(合)의 기회가 유실된 데에는 역사적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김영삼 정부의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
반대로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져온 대북포용정책의 성과가 결코 작지 않다. 만약 두 정부가 한미관계의 반(反)을 두려워해 부시의 대북강경책에 편승했다면, 오늘날의 '지연된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차 핵위기 때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한국의 대북정책과 남북관계는 합(合)의 시대를 열 수 있는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2007년 12월 대선 결과에 따라 또 다시 역사적 기회가 유실되지 않도록,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초당적 협력의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북핵 문제를 비롯한 이른바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 차원에서 상호 모순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그 자체가 동북아 질서의 최대 불안 요인으로 인식되어왔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의 다른 전략적 갈등의 표출을 억제하는 기능을 해오기도 했다.
이는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이후의 동북아는?' 이라는 질문을 낳게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동북아의 최대 불안 요인을 해결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동안 한반도 문제에 가려져 있거나 한반도 문제를 구실로 용인되어왔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드러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자, 즉 동북아에서 반(反)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 전자, 즉 한반도 합(合)의 과정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직면하게 될 근본적인 딜레마가 될 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역사적 기회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넘어선 상상력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먼저 미중 관계 차원에서 최근 한반도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2차 북핵 문제의 발생과 전개과정, 그리고 9.19와 2.13 등 일련의 합의 배경에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과 협력관계가 투영된 것이라면, 합(合)의 형태를 규정할 힘의 중심에는 미중 관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미국 단일패권주의가 쇠퇴할 조짐을 보이고, 중국의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가 급성장하고 있는 시기와 한반도 질서의 근본적인 재편 시점이 중첩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단일패권에 집착하고 있으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우를 범하고 있는 미국과 그 의도와 관계없이 강해질수록 그 의도를 의심받게 되는 중국 사이의 갈등과 협력 관계가 교차하는 시점에 한반도의 근본적인 질서 재편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나라는 각기 남북한의 동맹국이자 6자회담의 핵심적인 당사자이며 한반도 정전협정으로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평화포럼의 참가국이다. 이는 미국과 중국의 개별적인 정책과 미중관계의 향방이 한반도의 미래상에 중대한 변수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동맹의 역설
다음으로 일본의 선택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일본인 납치 문제에 매달린 나머지 외교정책까지 납치당한 일본이 과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동참할 것인가의 여부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 질서 전반에 상당한 변수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일동맹의 문제가 남는다. 북핵 문제 해결과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는 합(合)의 과정은 역설적으로 중국 대(對) 미일동맹 사이의 모순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반(反)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러시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확대 및 미국이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방어체제(MD)를 배치하는 것에 격렬히 반발하면서 '제2의 냉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은 동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이 실제로 있든 과장된 것이든, 지난 수년간 미국이 한미·미일동맹을 재편하고 MD 구축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북한위협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경화 및 군사대국화 역시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다. 그리고 중국이 이에 불만을 품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반도의 냉전해체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그리고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MD 체제에 대한 중국의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북한이라는 '커튼'이 걷어지는 순간,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중국과 맞닥뜨리게 될 운명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동맹의 역설'이 존재한다. 미국 주도의 동북아 동맹체제의 최대 위기는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의 역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한반도의 합(合)의 기운과 동북아의 반(反)의 기운 사이의 충돌이 또 다른 반(反)을 낳게 될지, 아니면 더 큰 합(合)으로 귀결될 지를 결정할 핵심적인 변수가 될 것이다.
합(合)의 시대에 직면한 세 가지 과제
결국 한반도 합(合)의 시대의 개막은 크게 세 가지의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핵 해결과 이에 대한 상응조치 사이의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방정식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라는 미시적인 과제이다.
둘째는 '한반도 합(合)의 시대가 다가올수록 모순이 크게 나타날 수 있는 동북아의 잠재적 대결 구도를 어떻게 슬기롭게 풀 것인가'라는 거시적인 과제이다. 한반도는 그 지정학적인 특성상 동북아 질서의 안정 여부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가지 과제 사이의 선순환적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 이를 극대화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6자회담을 동북아 다자간 안보대화의 틀로 발전시키는 것은 기본이다. 이미 그 운명이 다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동북아에너지협력기구로 확대·발전시키고, 한반도 비핵화를 넘어 동북아 비핵지대를 추진하는 것은 선순환적 연결고리의 핵심에 해당된다. 또한 동북아에서 군비경쟁을 억제하고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비축소를 모색할 수 있는 동북아 군비통제 기구의 창설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 두 가지 과제 수행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제가 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선순환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탈냉전적 상상력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