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달 장군의 등장은 6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577년경 그의 대(對)중국 전쟁 승리는 통일제국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北周)의 동진(東進)을 '일단 멈춤'시키고 평화관계를 정착시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후 고구려 제26대 영양태왕(재위 589~617년)이 598년 수나라에 선제공격을 가하기 전까지 고구려와 중국은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므로 온달 장군의 북주 차단은 을지문덕 장군의 수나라 차단에 버금가는 의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577년 직전의 봄철 수렵행사에서 혜성처럼 등장하여 대(對)북주 전쟁에서 대승을 일구어냄으로서 일약 고구려의 영웅으로 떠오른 '바보 온달'은 이후 10여 년간 부귀와 권세를 누렸다.
<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조(條)에 따르면, "(왕의) 총애와 영화가 더욱 두터워지고, (온달의)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고 돼 있다. 이와 같이 온달은 제25대 평강태왕(혹은 평원태왕, 558~589년)의 재위 기간 동안 태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해인 589년부터 온달의 신상에 중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전까지는 형식적 조공에 만족하던 수나라가 중국 통일의 여세를 몰아 고구려에게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7 평원왕조에 의하면, 수나라 문제(文帝)는 "비록 (말로는) 번속국(藩屬國)을 자칭하지만 성의를 다하지 않는다"며 고구려를 압박해 왔다. 평강태왕이 이 문서를 받아보고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수나라의 협박이 고구려에게 상당히 위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평강태왕은 숨을 거두었다.
평강태왕의 죽음과 온달의 위기
@BRI@이 시점은 온달의 인생에서 일대 위기였다. 온달이 대(對)중국 전승으로 일궈낸 국제평화가 수나라의 통일을 계기로 와해될 위기에 처했고, 온달의 최대 후원자인 평강태왕마저 사망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새로 즉위한 영양태왕(평강태왕의 장자)의 경우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양왕조에 따르면 자신을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적임자로 자임하던 사람이었다. 수나라의 침략을 네 차례나 막아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영양태왕도 호걸의 면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영양태왕에게 있어서 '영웅 온달'은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전쟁 영웅인 온달이 부마로서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영양태왕은 태자 시절부터 온달을 부담스러워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영양태왕 치세 하에서 권세를 잃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온달은 자기 세력도 별로 없었던 듯하다. 이 점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한다. 온달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여기서 잠시 온달의 성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본래 온달은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시장거리에서 동냥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차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공주 '밑'에서 조심스러운 결혼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또 그는 가난한 평민의 신분으로 대제국 고구려 왕실의 일원이 된 사람이었다. 이러한 점들은 온달이 '눈치를 잘 보는' 혹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평강태왕 사후에 온달은 눈치 빠르게 행동에 나선다. 그는 영양태왕이 즉위하자마자 즉각 도박을 건다. 온달은 태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태왕에게 먼저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아 올 터이니 군사를 내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그는 태왕의 허락을 받아 신라군과 마주한 최전방 아차산성(서울 광진구 소재)으로 향한다.
이 상황은 선왕인 평강태왕 때에 그가 중앙정계에 데뷔한 방식을 연상케 한다. 평강태왕 때에도 그는 북주와의 싸움에서 선봉장을 맡아 대승을 거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태왕의 신임을 받은 적이 있다. 영양태왕이 즉위한 직후에 온달은 태왕이 생각지도 않은 전쟁을 제의하면서 스스로 출정을 자처했다. 그리고는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공언까지 해버렸다. 스스로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온달 장군이 스스로 모험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중앙무대에 등장한 이후 10여 년 동안 온달이 자기 세력을 양성했다면, 온달이 영양태왕에게 '위험한 출정'을 자청할 때에 측근들이 분명 만류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온달의 간청이 태왕에 의해 쉽사리 가납된 것을 보면, 온달이 부마로 있으면서 자기 세력을 별로 키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장인인 평강태왕의 신임을 기초로 성장한 것이다. 이처럼 자기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태왕의 즉위 이후 일대 모험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온달이 선택한 싸움 상대가 수나라가 아닌 신라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강태왕 사망 직전에 고구려에게 시비를 건 것은 신라가 아니라 수나라였다. 그런데 온달은 수나라 대신 신라를 선택했다. 이는 그가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인 신라를 골라 '승산 있는 모험'을 하려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를 상대하기보다는 만만한 신라를 상대로 옛 땅을 되찾아온다면, 데뷔 당시에 그러했던 것처럼 태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영양태왕 세력에 의해 제거될지도 몰랐기 때문에, 기왕 죽을 바에는 전쟁에서 명예롭게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살아서 돌아온다면 좋은 일이고 설령 죽는다 해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성으로 간 온달
만류하는 이가 별로 없는 출정 길을 떠난 온달 장군은 서울 아차산성에서 신라군과 격전을 벌였다. 아차산성은 한강 이북과 이남을 연결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삼국시대에 이 지역은 삼국 간에 치열한 격전장이 되었다. 아차산성 전투를 자원한 것을 보면, 온달의 심정이 얼마나 비장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온달 장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히 용감하게 싸운 듯하다. 부마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격전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리고 날아오는 화살(流矢)에 맞아죽었다.신라 병사가 온달을 직접 겨냥해서 발사한 화살이 아니라, 빗나간 화살에 우연히 맞아 죽은 것이다. 이는 주변에 호위병들이 없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만큼 온달 장군이 혼신을 다해 정신없이 열심히 싸웠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온달조에서는 이 전쟁의 승자가 누구였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공주가 전투 현장에 와서 온달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기록을 볼 때, 고구려군이 온달 장군의 전사 후에도 아차산성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신라의 승리는 아닌 전쟁이었다.
신라로부터 고토를 반드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전사했으므로, 온달의 정치적 모험은 실패한 셈이다. 전승을 바탕으로 새로운 태왕의 치세에 또 한 번의 영광을 구가하려던 온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는 온달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 하였다"는 것을 볼 때, 용감한 죽음이 도리어 그의 존재를 더욱 값지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온사문 같은 자손들이 고구려에서 여전히 중요한 지위를 점하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영양태왕의 등장으로 위기에 처한 온달의 가문이 온달의 영웅적 죽음으로 회생한 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온달 장군은 정치적 후원자인 평강태왕이 죽은 직후의 정치적 기로에서 아차산성 전투를 자원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새로운 태왕의 신임을 얻는 것이고, 전쟁터에서 죽는다 해도 그에게는 손해 볼 게 없었다. 새로운 태왕 치세 하에서는 정치적 미래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보 온달'의 전설은 6세기 후반 고구려가 국가적 위기에 처한 시점에 평민 출신으로서 혜성처럼 등장하여 고구려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가 정치적 기로에서 스스로 모험을 단행한 온달의 비극적 종말을 담고 있다.
그는 데뷔할 때에도 영웅이었고, '은퇴'할 때에도 영웅이었다. '바보' 온달은 '영웅' 온달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야기 장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