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일전
한일전 ⓒ 전재옥
축구 한일전은 월드컵 본선경기 못지않은 폭발력을 갖고 있다. 한일전은 친선경기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감독의 운명을 갈라놓을 만큼 중대한 파장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1998년 요코하마에서 열린 제4회 다이너스티컵 때처럼 3월 1일에 일본에게 지는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국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역대 전적 68전 38승 18무 12패 108득점 57실점(2005. 8. 7일 현재)이 알려주듯이, 한일전 때마다 한국 ‘축구팬’이 아닌 한국 ‘국민’들은 모종의 짜릿한 통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의 독도 망언, 과거사 망언, 식민지배의 뼈아픈 추억들이 그 순간만큼은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 한일전의 희열은 온데간데없고 또다시 한 맺힌 응어리만 가슴 한구석을 뜨겁게 할 뿐이었다.

@BRI@해마다 한번 이상은 그런 응어리를 잠시나마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2005년까지 한일전이 해마다 평균 1.3회씩 열렸기 때문이다. 단순한 레저 활동이 아닌 정치적 행사의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축구 한일전은 스포츠 경기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치집회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반일감정과 축구 한일전을 가장 잘 활용한 정권은 반일정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박정희를 필두로 하는 친일군사정권이었다. 친일파가 반일감정을 잘 활용한 셈이다.

1972년 9월 14일부터 1991년 7월 27일 사이에 총 15차례의 한일정기전이 열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한일전은 있었지만 이 시기는 한일전이 아예 정례화한 기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기간이 친일군사정권의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던 시기라는 점이다.

친일군사정권이 집권한 1961~1992년 중에서, 1961~1971년은 군사정권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기간이었다. 그에 반해, 1972년 이후로는 친일군사정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운동으로 인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독재정권은 장장 20년 동안 고도의 탄압정책으로 국민을 짓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87년 6월항쟁 때에 한 차례 무릎을 꿇은 바 있는 친일군사정권은 1992년에는 민간 정치인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심각한 존립상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10월 유신 이후 정권 위기극복용으로 악용된 한-일전

그러한 위기는 1970년대 초반부터 잉태되었다. 미-일-한 3각 동맹 하에서 한반도 냉전을 기초로 유지되는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서 동·서 데탕트는 정권의 존립 기반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7·4남북공동성명과 10월 유신을 단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이 위기 극복을 위한 모색을 시도하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카드를 꺼내는 시점인 1972년 9월 14일 도쿄에서 제1회 한일정기전이 열렸다. 이후 서울과 도쿄 등을 오가면서 1991년까지 총 15차례의 정기전이 열렸다.

흔히 3S(sports, sex, screen)는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를 띠지만, 한일정기전은 그와 양상을 달리하였다. 그것은 국민들의 심리 저변에 내재된 반일감정이라는 정치의식을 인위적으로 끌어내어 정치적 효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축구를 통해 국민의 반일감정을 분출시키고, 그 분출의 관리자로서 정권 자신을 이미지화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은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고 1970년대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약해지는 미국의 지지를 내부에서 보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서 축구는 국민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정치화시키는 도구였던 것이다.

친일정권이 친일감정이 아닌 반일감정을 적절히 분출시키는 방식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메우려 하였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교묘한 시도이고 또 어찌 보면 모험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을 포함한 한국의 축구인들은 건전한 스포츠정신과 애국심으로 축구 한일전에 임했다. 그분들의 노력에 대해 한국 국민들은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다만 박정희 정권이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박정희 정권이 축구라는 종목을 선택한 것은 축구 자체가 국가주의적 측면을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한국 축구가 일본축구에 비해 우월하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축구 한일전에서 한국팀이 일본팀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박정희 정권이 그 종목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축구가 일본전에서 성적이 급강하한 이유는

ⓒ 김종성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1차 예선 때부터 1972년 7월 26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6회 메르데카컵 때까지 한국은 일본에 대해 20전 11승 6무 3패 36득점 19실점으로 압도적 우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한일정기전이 열린 기간인 1972년 9월부터 1991년 7월 27일까지 한국은 모든 유형의 한일전에서 30전 21승 5무 4패 53득점 20실점의 압도적 우위를 유지했다. 1972년 7월 26일까지의 패전율이 15%(20전 3패)였던 것에 비해, 이 기간의 패전율은 13%(30전 4패)로 다소 떨어졌다. 한국 축구는 친일군사정권의 기대대로 일본에 맞서 예전보다 더 잘 싸웠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일전에 비해 한일정기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더 잘 싸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일정기전에서만큼은 한국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므로 한국팀의 기록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분명 아니다.

1972~1991년의 30경기 중에서 15경기는 한일정기전이고 나머지 15경기는 일반 국제경기였다. 한국팀은 한일정기전에서는 15전 10승 2무 3패 25득점 13실점, 기타 일반 경기에서는 15전 11승 3무 1패 28득점 7실점의 성적을 거두었다. 일반 국제경기에 비해 한일정기전의 성적이 약간 저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일정기전에서는 한국팀의 실점(13실점)이 다른 경기(7실점)에 비해 두 배가량 많았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한국 선수들이 한일정기전에서 열심히 싸우긴 했지만, 다른 경기에 비해 부담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 선수들도 한일정기전 때에는 더 열심히 싸웠음을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한일정기전이 없어진 1992년 이후로는 한국팀의 성적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18전 6승 7무 5패 19득점 18실점이라는 근소한 우위가 그것을 보여 준다. 1991년 이전의 압도적 우위가 불과 1년 새에 막상막하 관계로 돌변한 것이다.

그런데 1992년 이후의 한일전에서 친선경기(비정기)를 제외한 일반 국제대회의 성적을 보면 한국팀의 성적이 약간 더 저조함을 알 수 있다. 한일정기전이 없어진 지 6년 만에 열린 1997년 친선경기 이후 한국팀은 한일 친선경기에서 6전 3승 2무 1패 6득점 4실점의 근소한 우위를 거두었다. 하지만, 다이너스티컵·아시안게임·월드컵예선·동아시아대회에서는 12전 3승 5무 4패 13득점 14실점의 근소한 열세에 머물렀다. 친선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국제대회에서는 한국이 약간 열세에 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1997년 이후의 한일 친선경기가 한국팀의 한일전 전적을 보충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친일군사정권 때의 한일정기전 때에는 일본팀이 평소보다 더 잘 싸웠지만, 1997년 이후의 비정기 한일전에서는 한국팀이 평소보다 더 잘 싸웠던 것이다.

반일감정을 활용한 박정희 친일정권

한국팀이 한일정기전 폐지 이후로 갑자기 성적이 저조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로는 1993년부터 친일군사정권이 문민정권으로 대체되었다는 점과 1993년 5월 15일부터 일본 프로축구 J리그가 출범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일전 부담을 주던 친일군사정권이 사라진데다가 일본 축구의 실력이 크게 상승했기 때문 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J리그 출범 이후 일본대표팀의 실력이 상승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친일군사정권 종식 이후부터 한국팀의 성적이 갑자기 급강하한 주요인은 한일전에 목숨을 걸던 정권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92년 이후로 한일정기전이 열리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은 비록 친일군사정권의 후계자이기는 했지만, 과거 정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민주적 정통성이 더 나은 정권이었고, 김대중 정권 이후로는 민주적 정통성의 시비가 사실상 사라진 상황이다. 친일군사정권에 비해 그 이후의 정권들은 스포츠를 통한 정통성 창출의 필요성을 덜 느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97~ 2003년에도 6차례의 한일 친선경기가 열리긴 했지만, 과거 한일정기전 만큼의 ‘열기’를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스포츠를 통한 정치적 효과의 산출은 이전 정권보다 지금 정권이 더 잘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런 오해를 낳는 데는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는 매스 미디어나 영상기술의 발달, 스포츠와 상업의 접목 등으로 인해 스포츠와 대중의 밀착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가 아닌 미디어·상업 분야 등이 스포츠 열기를 주도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2002년 월드컵 개최 때문에 한국인들의 스포츠 열기가 일시적으로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국민의 반일감정을 축구 한일전으로 분출시키고, 그 분출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정권은 뜻밖에도 친일군사정권이었다. 상식대로라면 친일감정이 그 정권을 떠받쳤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반일감정이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정통성이 약한 친일군사정권이 동·서 데탕트 이후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엉뚱하게도 국민의 반일감정을 잘 활용하였던 것이다.

국민의 반일감정을 분출시키면서도 독도·과거사 등의 한일관계를 제대로 해결한 게 거의 없다는 점을 볼 때, 친일군사정권은 반일감정을 이용하기만 했을 뿐 실제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반일 조치’는 거의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식민통치의 뼈아픈 경험에 바탕을 둔 반일감정을 교묘히 활용하면서도 얼마 되지 않은 식민통치 보상금마저 가로챘다는 점에서 박정희 친일정권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정권이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신세력은 대통령 박정희가 국민소득을 올리기 위해 추운 겨울에 내복도 입지 않고 산 적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국민의 ‘아픈 부위’까지 악용한 점을 볼 때에 대통령 박정희가 내복을 입지 않고 산 것은 국민을 위해서 아니라 그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였을 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은 남의 아픈 상처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정작 남을 이용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정통성 있는 정권이라면, 박정희 친일군사정권처럼 스포츠를 통해 국민을 인위적으로 통합하려 할 것이 아니라 양극화 해소 등의 실질적 방법으로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 데에 더 주력해야 할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