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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짜리 내 친구' 영주 녀석이 달라졌습니다. 아, 설을 쇠었으니 올해 네 살이 됐군요.
아무튼 우리 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영주 녀석이 예전과는 달리 말수가 부쩍 적어졌습니다. "농부 아자씨, 닭장에 가자"라며 여기 가자, 저기 가자라면서 내 손을 끌고 다녔는데 이젠 그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입니다.
거기다가 꼬박꼬박 존댓말을 붙입니다. 예전처럼 "곰순이 무서워?", "인효 형아 어디 갔어?"식으로 친구하고 대화하듯 했는데, 지금은 "곰순이 무서워요?"라고 '요'자를 붙여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 우리 집에 오면 '내 집이다' 싶게 부엌에서 안방으로 안방에서 뜰팡으로, 뜰팡에서 사랑채로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녔는데 부엌이면 부엌, 안방이면 안방 한 곳에서만 놉니다.
@BRI@세상 구경나온 아기 새처럼 끊임없이 쫑알쫑알 거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커다란 두 눈을 꿈뻑꿈뻑거리며 질문보다는 대답을 더 많이 합니다.
아내가 "영주 미워, 영주 바보!" 하면 "아줌마 싫어"로 응수 하지 않고 그냥 헤 웃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뭐 영주의 신상에 나쁜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주네 집안에 경사가 났습니다. 20일 전쯤에 영주 동생이 세상에 태어났거든요. 영주네 집안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의 큰 경사였지요.
4년 전 우리 동네에 기저귀가 걸려 있던 집이 있었는데, 그 기저귀를 찼던 희준이 녀석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동네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희준이는 잠시 외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10년 동안 우리 동네 주소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영주와 영주 동생이 전부였습니다. 아, 이제 우리 동네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아이가 누구인지를 수정해야겠군요.
대문 없는 영주네 집 대문간엔 보란 듯이 금줄이 쳐졌습니다. 예로부터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쳐놓은 금줄. 영주네 금줄에는 빨간 고추가 없었습니다. 새끼줄에 검정 숯이 꽂혀 있었습니다. 이번에 세상에 태어난 영주 동생은 여자 아이입니다.
예쁜 아기 민영이도, 영주 엄마도 모두 건강합니다. 자연분만으로 영주 동생을 순산했는데 그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아내와 통화할 정도로 아주 건강했고, 지금도 여전히 건강합니다.
사진을 찍으며 금줄은 단지 새끼줄에 숯을 꽂아 놓은 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금줄 앞에 서면 조심스러워지고 뭔가 마음가짐을 달리 해야 할 것만 같아집니다. 마음가짐을 달리한다는 것은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자 함입니다. 설령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 해도 금줄 앞에 서면 좋은 마음을 내고자 합니다.
한동안 금줄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아파트 생활을 할 때라서 금줄은 꿈조차 꾸지 못했습니다. 언제 보았나 싶게 까마득히 잊고 살아왔습니다.
금줄은 단지 미신이 아닙니다. 미신으로 보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어떤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라만상의 신성한 것들을 신성하게 바라보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욕망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쯤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이야말로 미신이 아닐까요?
사전에 보니 "미신이란, 마음이 무엇에 끌려서 잘못 믿거나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것을 맹신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미신이란 자신의 종교를 합리화시키거나 정당화시키고 다른 믿음을 배척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금줄은 믿고 안 믿고 차원이 아닙니다. 새 생명이 태어난 것에 대해 마음가짐을 조심하고 좋은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나쁜 마음을 억제시켜 줍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샘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신성한 마음을 자극해 퍼올리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금줄은 충분히 신성물인 것입니다.
금줄이 그러하듯 우리 주변에 신성한 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신성한 것들이 사라져 가니 이웃 간의 정도 메말라 갑니다.
금줄은 나눔의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아이의 탄생을 통해 이웃 간의 정을 나눴습니다. 미역 한 꾸러미씩이라도 들고 찾아갔습니다. 쌀 한 됫박이라도 서로 나눴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가져온 식량들은 산후조리하기도 힘든 가난한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금줄은 황폐화되어 가는 농촌의 희망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금줄 사진을 다 찍고 나서 심심해 하는 영주 녀석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때맞춰 밥상머리 앞에 둘러앉았습니다. 장난끼 많은 아내가 늘 하던 장난을 걸었습니다.
"영주야! 해정 언니 해봐."
"……."
영주 엄마가 아내에게 '해정언니'라고 부릅니다. 그걸 장난끼 많은 영주 녀석이 곧잘 따라 했는데 이번에는 눈만 멀뚱멀뚱 뜨고 그저 헤 웃기만 합니다.
"영주야 애기는 뭘 먹냐?"
"엄마 쭈쭈 먹어요."
예전에는 엄마와 입씨름으로 간신히 해결했던 밥 한 그릇을 군소리 없이 뚝딱 해치웁니다. 그뿐 아닙니다. '해정언니'의 말은 죄다 장난으로 알아듣던 녀석이었는데 또박또박 말도 잘 듣습니다. 형아들처럼 빈 밥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습니다. 뒤돌아서서 헤 웃습니다.
말없이 헤 웃고 있는 녀석을 보다가 문득 녀석네 대문간에 걸려 있는 금줄을 떠올렸습니다. 녀석의 말 없음은 단지 동생에게 엄마를 내준 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이긴 하지만 녀석의 의식 속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어 보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눈빛에서 어떤 신성함을 접할 때처럼 영주 녀석의 말 없는 눈빛은 어떤 신성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녀석은 마치 집 대문간에 금줄을 쳐놓고 어떤 큰 행사를 앞둔 제주(祭主)처럼 말을 삼가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터무니없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의식 세계의 깊이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