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김동화 화백은 프랑스 만화비평협회로부터 가슴 벅찬 고백을 들었다. 2003년 스위스 파케 출판사를 통해 유럽권역에 수출된 <빨간 자전거>가 2006년 ‘프랑스 만화비평대상’ 최종 다섯 후보에 들었다는 소식과 함께 벽안의 그들은 이제껏 자신들이 “한국만화를, 큰 관심 없이 일본망가의 아류로 간주해왔다”며 “작은 책 <빨간 자전거>가 자신들의 관점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고백해왔던 것. “명상적이고 부드럽고 시적인 이 단편집은 아시아 만화가 보여준 생각이나 그래픽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림, 내레이션, 모든 것이 순수하고 감동과 향수로 가득하다”고 했다.
수년 전 한국만화가협회를 비롯, 만화가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만 해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만화책으로 꽉꽉 채워진 라면박스에는 “우리 가진 만화를 소개하자”는 욕심 아닌 욕심이 한가득이었다.
"설레고 부끄럽고,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시작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 당장의 실적이 있든 없든 꾸준히 참가했지. 그래서인가, 그쪽도 우리 만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빨간 자전거>가 스위스 출판사 파케를 통해 현지 출간되게 됐지."
내심 걱정도 많았다. 다분히 한국적인 정서가 그곳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을 것인가. 그렇지만 그의 걱정을 덮듯 그곳 한 출판인이 “고향이나 가족, 그리움이라는 정서는 어디나 똑같다”는 말을 들려줬고, ‘빨간 자전거’는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김 화백의 말을 빌자면 “일본 만화의 쫀쫀한 틀과는 또 다른 한국 만화의 자유스런 소재나 이야기”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해를 거듭하면서 그 인기가 오르고 있다.
<요정 핑크> 등으로 1980년대 하이틴 여학생들을 울고 웃겼던 순정만화계의 대부인 그가 1990년대 초 <황토빛 이야기>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 사건에 주변의 우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급선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만화를 어른들에게까지 읽히자는 것.
"어른들이 보는 만화를 그리자고 생각했어. 사실 만화가 아이들 것이다 보니 어른들은 만화에 무관심해지고,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만화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모두가 보게 만들자고 생각했어. 그리고 열심히 했어. 새로운 만화는 늘 긴장하고 신선해야 하는 거니까."
새로운 소재에 맞춰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그림이 따랐다. 트레이드 마크와 같았던 얼굴의 3분의 2는 차지할 것 같던 큰눈이 10분의 1 크기로 줄고, 화려한 드레스 대신 고운 한복이 입혀졌다.
‘공들인 새로움’에 유럽도 화답했다. <빨간 자전거>에 이어 <기생 이야기>와 <황토빛 이야기> 등이 출간됐다. 그의 그림 한 장을 얻기 위해 한 시간 이상 김 화백의 숙소 앞에서 기다렸던 이탈리아의 한 대학 교수 부부처럼 살뜰한 팬들도 생겨났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그는 말한다. 차츰 알려지고 조심스레 관심이 모아지는 지금, 카스터만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한 출판사들이 우리 만화를 찾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를 알릴 때라고 말했다.
“포니를 만들 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듯 자동차 수출 강국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 못했을 거야. 일본 만화가 아직 강세이지만 우리한테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와 독특한 그림체, 작품의 높은 퀄리티가 그 승부사가 될 거야. 전국에 자라고 있을 젊은 만화학도들에 거는 기대가 아주 커.”
"커미션 10%를 넘어 만화를 위해" -박정연 오렌지에이전시 대표
최근 수년간 확실한 수치 변화를 보이며 세를 불려나가고 있는 우리 만화 수출에는 국내 에이전시들의 활약이 크다. 이 가운데에서도 유럽권에 관한 한 단연 오렌지에이전시(대표 박정연)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오렌지는 현재 불어권 즉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룩셈부르크와 독일, 스페인, 미국 등에 120여 개 타이틀이 우리 만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이 중 95여 개 타이틀이 불어권에 나가 있다.
박정연 대표가 에이전시 쪽에 뛰어든 건 4년 전쯤. 당시만 해도 만화계에는 이렇다할 만한 에이전시가 전무했다. 통역대학원을 졸업하던 2003년 소설 작품을 중심으로 에이전시 업무를 해오던 박 대표는 차츰 만화와 인연을 맺게 됐고, 이듬해 9월 오렌지에이전시를 세우면서 전문적으로 만화 수출 전선에 서게 됐다.
"처음부터 만화가 좋아 뛰어든 건 아니에요. 책을 좋아하고, 사람과 사귐을 좋아하는 때문인지 이쪽 일에 저절로 발이 갔죠."
거래처라고 할 수 있을 프랑스 출판사들을 '뚫어가면서' 내공도 점점 쌓여갔다.
돌아보자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픔도 있었다. 한국 만화 소개 CD를 우편물로 받은 한 프랑스 출판사는 박 대표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설움은 국외에서 그치지 않았다. 국내 일부 출판사들은 아직도 에이전시를 하수인으로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시련은 지나가게 마련. 그 자리에는 노력을 밑거름으로 한 크고 작은 열매로 채워졌다. 김동화 화백의 <빨간 자전거>가 프랑스 만화 비평가협회상의 최종 다섯 후보에 올랐을 때, 권윤주 작가의 가 프랑스 동물보호협회의 ‘3백만 친구상’을 수상했을 때, 변병준 작가가 PACA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리고 각종 만화 사이트에서 한두 개의 짧은 문장일지라도 성원을 보내는 네티즌들을 접할 때면 박 대표는 많은 힘을 얻는다. “그때 불쾌한 반응을 보였던 출판사는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스를 찾아와 과거 일을 사과하며 프러포즈를 제안하기도 했고요.(웃음)”
수출을 원하는 쪽과 수입을 원하는 쪽의 입맛을 맞추고 협상하고 결과물을 내는 것. 더 정확히는 수출 대상 출판사별로 원하는 장르나 취향을 조사하고 여기에 맞는 작품을 선별해 보내고, 선인세나 로열티 등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고 협상하는 것. 이것이 에이전시의 업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박 대표는 말한다.
“우리는 한국 만화계와 프랑스 간의 연결 창구라고 생각해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만화에 대한 현지의 어떤 평들도 우리가 1차적으로 받게 되죠. 우리가 받는 보수는 커미션 10%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고 넓힐 수 있는 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해요.”
2005년에는 이러한 창구로서의 역할 강화를 위해 ‘오렌지 만화 뉴스레터’를 펴내기도 했다. 소개된 한국 작품에 대한 현지의 평가를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모두 실어냈다. 레터에 대한 출판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여력이 달려 지난해부터는 잠시 쉬고 있는 상태이지만 곧 재개할 예정.
반갑게도 만화 수출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발간된 한불 만화가들의 기념집과 최근 발행돼 앙굴렘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최초의 한불 합작 만화 <용의 기사>이 그렇다.
이미 포화상태인 일본의 망가. 이를 이겨내기 위한 우리 만화들의 공세도 달아오르고 있지만 외국 출판 관계자들의 거름망이 한결 까다롭고 촘촘해진 것도 사실이다. 위상이 올라간 만큼 갈 길은 더 험난해진 것인지 모른다. 해외 전시에 대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등 정부기관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들, 외국 작가와 함께하는 프로젝트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가능성 많은 우리 만화가 나래를 펴기 위해.
"국외적으로 한국 만화를 일본 망가의 아류로 보는 시각이 완전히 해소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웹만화, 모바일만화 등을 비롯, 기술과 접목된 무궁무진한 볼거리를 갖추고 있는 것, 바로 우리 만화입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외국 출판사 관계자들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재능 많고 역량 있는 한국 작가들, 그들의 무대는 이제 한국만이 아닙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