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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친구들과 같이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없었던 탓에 고등학교는 첫 등교때부터 설렘보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해왔다. 새벽 3시부터 일을 시작해 마치는 시간은 오전8시.

며칠 남들보다 등교를 늦게 하자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너는 왜 항상 지각을 하니?"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서 신문배달을 해요."
"그래.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왔으니 다른 친구들과 같이 대학을 가야지. 그만둬라."


계속된 강요와 체벌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연이어 긴 머리를 자르고, 강제적으로 문제집을 사고 야간타율학습, 체벌 등을 겪어야 했다. 처음엔 이런 학교와의 마찰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누구 한 명 '아니다', '싫다'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학교 그늘에 가려 규제와 타협을 강요받을 수 없었다.

1학년 여름방학, 반강제적으로 실시한 보충수업을 반에서 홀로 거부하였다. 보충수업을 안 하는 대신 전교 성적등수대로 체벌을 받겠다는, 교사의 일방적인 조건부 선택을 택했다. 그때 당한 체벌은 온몸에 멍이든 신체적 아픔을 주었지만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학교와의 치열했던 싸움, 씻을 수 없는 아픔

@BRI@2000년,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줄임 학연)'이라는 청소년 인권, 교육에 고민을 갖고 있는 모임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어 만남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학교가 싫어서 선생이 싫어 공부가 싫어 반항심에 모임을 나갔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문제의식은 사소한 불편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서울에서의 두발 자유화 운동을 시작으로 대전, 광주, 부산 등 광역시에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 교육당국의 탄압으로 친구, 선배, 후배들이 징계를 받고 심한 경우에는 퇴학을 당해 활동의 위협을 받았다.

초창기 나는 익명으로 활동한 탓에 선배들의 몸받이(탄압)에 의해 제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2학년 당시 집회(캠페인)신고 주최자였기 때문에 나도 그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집회마다 얼굴 가리며 참석하는 학생들보다 이를 지켜보는 교사, 장학사들이 많았던 탓에 학생들은 긴장에 떨어야 했다.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탄압을 경험하게 됐다. 회원명단을 공개하고 탈퇴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이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2~3개월 동안 수업도 못 받고 경찰서 뺨치는 조서를 쓰는 일이 힘겨워, 2주일 동안 집, 학교와 연락을 끊은 적도 있었다.

그 2주 동안 많은 일이 생겼다. 장학사는 동생도 학교 다니기 힘들 거라는 협박을 집에 했고, 학교에서는 학연과 전교조의 있지도 않은 배후관계를 만들었고, 불법단체 활동이란 명목으로 나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그 억울함을 풀기위해 다시 학교를 나갔지만, 학교는 이 문제를 하루빨리 정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전교조에서 배후관계 해명과 탄압을 중지하라는 요청에 3자(교장, 전교조 교사, 본인)는 눈물 섞인 지장으로 합의를 봤고 일은 원만히 종결되었지만 당시 나의 마음에 긁힌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

현실 불복종은 결국 대학을 거부를 하게 만들었다

'고3, 대학입학예정자, 수험생'이란 꼬리말을 달고 있을 때, 난 입시공부가 아닌 직업학교로 등교, 컴퓨터시스템 공부를 하였다. 물론 대학을 거부하는 대신, 학교 분위기 흐리지 말라는 차원에서 쉽게 직업학교를 보낸 것이다. 1년 동안 하고 싶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회에 조금씩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연은 활동탄압과 각종 규제들로 인해 와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수학능력시험이 내게도 다가왔다. 10대라면 한 번쯤은 거쳐 갈 국가고시 '수능', 확실한 진로를 결론짓지 못한, 결정된 것이 없는 나로서 수능은 마지막 현실 타협의 수단이 될 뻔했다.

친구들과 같이 수능원서를 접수하고, 학연 선배들이 많이 간 진보적으로 불리는 ㅅ대학교 사회과학부에 입학할 생각에 원서구입에 적지 않은 돈을 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대학을 가야한다는 생각이 막연하지만, 3년의 학연 활동이 대학을 가기 위한 조건의 일부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미치자 고민을 하게 됐다.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 또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고민이 되었다.

수능 날, 나는 어머님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수능고사장으로 가서 후배들의 환영을 받아야 했지만, 나는 한 손엔 도시락 한 손에 피켓을 들고 광주광역시 교육청으로 걸어갔다. 당시 대학평준화, 수능자격고시화란 주장으로 학벌 없는 사회와 여러 단체에서 각 지역 교육청 동시다발 일인시위가 진행됐다.

물론 이 행동이 없었더라도 내 시험을 거부하는 신념은 이미 결정돼 있었다. 그러나 밖에서의 당당함은 어디 가고 집에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고등학교 3년간 부모님을 속썩인 것도 모자라, 수능을 안 보고 대학을 안 가는 내 신념 아니 고집이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광주 흥사단에서 반년 동안 근무, 이라크전쟁 관련 반전평화운동 등 NGO 운동을 하게 됐다. 주위의 조바심과 조언도 많았지만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는 한 난 현실도피·부적응자가 아닌 현실과 싸우면서 당당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박형준 기자는 청소년인권단체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이 기사는 <전태일통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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