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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커갈수록 부모의 걱정 또한 크기가 커진다. 한때 내가 나가 있던 중동 시절에는 걱정 또한 작았다. 이때는 그런 고통을 몰랐다. 어린 시절의 아들 생각을 하면 지금 이 나이 아들도 귀엽다.
지금은 함께 있어도 그리운 아내가 그때는 더 그리웠다. 그런 만큼 아내는 내가 그리웠다. 꽃다운 아내를 품었던 처녀 시절이 생각난다. 어린 것을 품에 안은 아내가 생각난다.
그때 그 시절 1978년 8월 16일자 아내의 편지는 '다정한 아빠'라고 시작되었다.
이곳 아침저녁 날씨가 차차 서늘해져가고 있어요. 가을이 곧 올 것 같아요. 가을 하니까 괜스레 쓸쓸해져요. 가을이란 낱말이 무척 외로운 것 같아요.
그곳 날씨는 여전히 덥죠? 몸조심하세요.
식사는 이제 좀 어떤지요. 조금씩이라도 꼭 드세요. 식사를 잘 하셔야 기운이 생겨서 일을 하지요. 기운이 없으면 지쳐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익숙해질 거예요.
요즘은 토요일이나 공휴일이 되도 평일과 잘 구별이 안 돼요. 계단 청소를 하면 일요일인 것을 알고 신문이 안 오면 월요일인 줄 알죠. 그렇지만 날짜 가는 것은 정확하게 알아. 우리 집 일력은 항상 오늘이 며칠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죠.
8월 14일은 우리가 잠실로 이사 온 지 만 일 년이 되는 날이에요. 처음 이사 올 때 무척 좋아하던 생각이 나요. 그런 것을 보면 일 년이 잠깐인 것 같은데 지금은 생각하고 기다리니 더디 가는 것 같아요. 아빠가 있었으면 시원한 맥주로 축하주 한 잔 쯤 준비해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보냈을 텐데요.
그리고 또 이 날은 차 서방 생일이여서 엄마는 영동 AID아파트로 가시고 정태와 둘이서만 집에 있었죠. 그런데 정태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혼났어요. 정태 자신도 졸리면서 잠을 못자고 잠투정을 계속해서 3시간을 하다가 밤 10시가 다 되어서 겨우 잠이 들었어요.
재우고서 뒤돌아서면 다시 깨서 울고 또 다시 그러기를 열 차례는 했을 거예요. 너무 속이 상해서 볼기를 몇 차례 때렸어요. 그리고서 자는 모습을 보니 애처로워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어린 것이 무엇을 안다고 내가 그랬나 생각하니 나는 아주 나쁜 엄마인 것 같았어요.
마음이 아프더군요. 그래서 정태에게 빌었어요. "아들아, 정말 미안하다. 엄마가 잘못했다"라고요. 그러면서 손을 꼭 잡고 울어버렸어요. 아마 그것이 엄마 마음인가 봐요. 속을 썩이면 미워도 그것은 순간, 다시 예뻐지고 사랑스러워지는 것이 엄마 아빠 마음인가 봐요.
광복절에는 하루 종일 TV를 봤어요.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영화처럼 세월이 잘 갔으면 좋겠다고요. 화면이 바뀌면 세월이 어느새 성큼 가버리잖아요. 그리고 아무리 길어야 두세 시간 안에 다 끝나버리니까요.
우리도 영화 같이 화면이 바뀌면 한 달이, 또 바뀌면 반년이 지나는 것처럼 날들이 그렇게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어린 아이 같은 철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아빠가 보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에요. 아빠 정말 보고 싶어요. 한 달에 한 번, 아니 두 달에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참 좋겠어요. 그렇지만 참을게요. 꼭 참을게요. 아빠도 꼭 참으세요.
1978. 8. 16
아빠의 아내, 숙
이제는 늙은 부부가 된 우리 부부다. 자식은 이제 떠날 차비를 하고, 우리는 처녀 총각 때처럼 단 둘이다. 아직은 곁에 있는 아들 걱정과 취직하여 독일에 가있는 딸 걱정으로 늙어 가는 일만 남았다.
젊은 날에 꿈꾸던 노후는 자식들에 대한 불안, 걱정으로 지켜보는 삶인 줄 몰랐다. 누구는 이것을 행복이라고 한다. 인간은 행복한 착각 속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