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식(이하 식) : 4일 동안 100평 정도 되는 대형 천막 안에서 행사를 했는데 공식 집계로 8만 명이 잡혔지만 사실 수를 세다 중간에 포기를 할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지막날에는 입장제한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한국 만화를 효과적으로 알려낼 수 있는 행사였다. 만화관련 행사 중에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이하 앙굴렘) 축제사무국에서 당시 세계 만화의 변방이던 한국에 주빈국전을 제안한 배경은 무엇이었나?
박인하(이하 하) : 당시 30주년을 맞는 앙굴렘은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앙굴렘이 출범한 1973년도는 역사적으로 <필로트> 창간 이후 뫼비우스 등의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그래픽 노블이 많이 등장하고 있었던 시기였고, 만화에 대해 프랑스에서는 만화도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장르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그런 것들이 쌓여 앙굴렘은 불어권 만화의 전문적인 페스티벌로서 색깔을 갖고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듣기로는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페스티벌은 점점 한계에 부딪혔고, 그 한계는 일본의 ‘망가’가 미국과 유럽에 진출하면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별것 아닌 만화로 치부했던 망가가 1990년대 후반 시장에 파워풀하게 등장, 급기야 2000년 큰 세력으로 성장하자 앙굴렘 조직위도 앙굴렘페스티벌이 유럽권 뿐 아니라 범세계적 만화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하게 됐고, 2002년 일본만화전이, 2003년에는 한국만화특별전이 개최되기에 이른 것이다.
변병준(이하 변) : 원화 전시로 참여했는데 현지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프랑스 독자들이나 평론가들은 원화에 대해 굉장히 높은 점수를 줬다. 한국에서 내 독자층은 20~30대인데 그곳에서는 50~60대들도 내 만화를 보는 등 높은 연령대의 독자층에도 많이 놀라고 좋았다.
식 : 고경일 교수 경우 현장에서 캐리커처 시연을 했는데 현지 관람객들의 반응은 어땠나?
고경일(이하 고) : 앙굴렘 팬들이 굉장히 신기해하더라. 한국 종이와 붓, 또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카툰들에 대해. 그쪽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캐리커처여서였다. 그때 종이를 100장 넘게 가져갔는데 4일 행사 동안 다 쓰고, 재료를 다시 구입하기도 할 만큼 인기였다.
식 : 공식적으로 초청레터가 한국의 문화관광부로 접수되면서부터다. 정부 차원에서 만화계에 주도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의사도 밝혔고, 실제로 당시 만화계 뿐 아니라 다른 문화계를 통틀어 굉장히 큰 규모의 예산을 행사에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앙굴렘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과연 우리가 어떤 콘텐츠를 가져가, 어떻게 알릴지도 굉장히 중요했는데 큐레이터 차원에서 어떤 점들을 주로 고민했나?
하 :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한국의 사회, 문화와 함께한 만화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에 대한 문화적인, 사회적인 배경지식이 희박한 상태라는 점이 가장 답답했다. 그런데 고맙게도 2002년 월드컵으로 한국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한국의 만화가 독립돼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와 함께 존재한다는 큐레이팅 콘셉트로 접근, 전시는 물론 참여 작가, 길놀이패 공연, 출판물 등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보여주자’는 계획을 세웠다.
‘만화’를 성공적으로 알리다
식 : 그랬다. 앙굴렘2003을 3~4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추억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Manhwa’라는 브랜드를 처음으로 해외에 알렸던, 그리고 만화라는 브랜드 안에 만화가 가진 역사성, 문화적 정체성, 역동적인 면들을 개념화시켰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화라는 브랜드를 해외에서 쓸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국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만화라는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결정 뒤에 어떤 숨은 이야기들이 있나?
하 : 문제는 ‘우리의 만화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였다. 한국의 문화사회적인 것을 보여주려 했었던 것도 ‘만화’가 일본의 망가와는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었듯 당시 행사를 주관하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까지 모두의 고민이었던 것은 ‘망가냐, 만화냐’였다.
일부에서는 프랑스 내 수요가 있는 일본만화에 얹혀 가면 편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봤을 때 망가의 인기와 시장에 편승하는 것보다는 ‘만화’라고 우리의 브랜드를 갖고 가는 것인 장기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만화’를 내세우게 됐다.
식 : 그런데 실제 앙굴렘 행사 이후 직접 느낀 것이나 해외 네트워크에 있어 달라진 게 있나?
변 : 최근 앙굴렘에 갔을 때, 만화 브랜드를 꼭 구별해서 쓰는 모습을 봤다. 통역자도 질문하는 사람들도 앙굴렘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만화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 고등학생들이 망가로 잘못 알고 있는 우리 작품들에 대해 만화라고 바로잡아줄 수 있었는데 그때 만화 브랜드를 선택했던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혼동되더라도 짚어 말해줄 수 있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앙굴렘과 Manhwa의 내일
식 : 앞으로 세계 만화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하 : 한국이 가진 다이내믹하며 풍요로운 웹만화가 미국이나 서구의 문화권에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또, 회자되고 있는 학습만화, 기획만화들 소위 ‘에듀케이션 만화’ 역시 미국이나, 특히 중국에 진출해볼 만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변병준, 최규석 등 젊은 작가들의 천천히 나오고 있는 단편들의 작품들에 여전히 관심을 갖고 구매를 해가고 있다. 한국만화가 장르만화 시장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는 있지만 어떻든 새로운 시장에 대한 개발의 여지 역시 충분하다.
변 : 나는 현재 프랑스 작가랑 작업중이고, 최규석이나 변기현 작가 등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는 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두 프랑스에서 별도로 (작가를) 소개시켜 준 경우들이다. 자유롭게 풀어주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게 하는, 좋은 방식이라 생각한다.
식 : 앙굴렘2003을 통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세계 만화계와 소통하기 위해 우리 만화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하 : 우리도 앙굴렘처럼 문화적으로 만화를 소비하는 대규모 전시를 일본, 미국, 중국 등 권역별로 또 주기적으로 전시했으면 좋겠다. 또, 시대와 문화와 경제 그리고 만화가 어떻게 대중들과 만나고 대중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웃었는지 국내에도 알릴 필요가 있다. 하나의 교양 프로그램처럼 전시, 출판물, 웹사이트 등이 모듈로 한국에서도 순회전도 하고 일본, 미국, 유럽에도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변 : 누가 뭐래도 문화적 인프라는 문화인들이 만들어가야 할 몫이다. 창작자들이 과연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지역에 침투해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작가 입장에서는 좋은 만화를 생산해내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식 : 2003년 앙굴렘에서의 추억은 수많은 우리 만화 작품들과 수십 명의 길놀이패까지 동원돼 한마당 축제를 벌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만화인들에게도 그만큼 즐거운 잔치가 없었던 듯하다. 우리 만화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이 이야기들이 세계 만화인들에게도 행복한 추억으로 공유됐으면 좋겠다. 긴 시간 말씀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 | 참석자 프로필 | | | | 박인하 한국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2003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 한국 주빈국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고경일 일본 교토 세이카이대학 스토리만화과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 상명대학교 출판만화전공 교수로 재직중이다.
변병준 1995년 겨울 <그 해 여름날의 코미디>로 대원씨아이 신인 만화상을 통해 데뷔. <프린세스 안나>, <달려라, 봉구야!> 등의 대표작이 있다.
박성식 한국출판만화협회 사업국장.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만화산업팀장으로 일하며 2003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한국 주빈국 전시 프로젝트 매니저로 참여했다. | | | |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