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문이당
주목할만한 신예의 화려한 탄생이다. 한국 문학상 중 가장 큰 상금(1억원)이 걸린 세계문학상(세계일보 주관) 3회 수상자인 신경진(38). 그가 쓴 첫 장편 <슬롯>(문이당)은 붉디붉은 표지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선다.

신인의 첫 소설에 던진 심사위원들의 찬사도 볼 만한다. "부유하는 인간존재의 아릿한 슬픔을 만날 수 있다"(소설가 박범신)에서부터 "재미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의 불확정성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우울함과 외로움이 절실하게 드러난다"(평론가 하응백)까지.

뿐인가. 이화여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미현은 한 걸음 더 나가 "도박 권하는 사회에 메스를 권하는 소설이다. 이 걸 읽고도 도박을 해보지 않는다면 인생에 무심한 사람"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그렇다면 대체 <슬롯>은 어떤 내용을 담은 작품일까?

비루한 일상을 살고 있는 한 사내에게 옛 애인이 전화를 걸어온다. "오빠, 나 이혼했어. 내게 10억이 있는데 이걸 카지노에 가서 다 써버리자." 황당하고, 기이하며, 기상천외한 제안이다. 그러나, 사내는 그걸 거부하지 못한다. 인간 내부마다 잠재된 타락 혹은, 자멸의 욕망 탓이었을까?

잘 빠진 독일산 자동차를 타고 강원도 산골짜기에 위치한 카지노를 찾아가는 사내와 옛 애인. 10억을 도박으로 탕진하기 위한 여행이었으니, 당연지사 룰렛과 바카라, 슬롯머신과 블랙잭 등의 생경한 도박관련 단어가 출몰하고, 도박과 쌍을 이루는 술과 여자가 술렁인다.

소설의 서두를 '이 이야기는 도박과 여자에 관한 것이다'라고 단정 짓고 출발하는 신경진은 빠른 호흡과 잘 조탁된 문장으로 독자들을 매혹한다. 책을 읽는 내내 커다란 룰렛판 앞에서 주사위를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슬롯머신의 바(Bar)를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 정도다.

하지만, <슬롯>은 이런 재미만으로 끝이 나진 않는다. 책 곳곳엔 앞서 평론가 하응백이 언급한 바 '자본주의 비판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 그것들은 등장인물을 통해 서서히 또는, 급작스럽게 드러난다. 꼭히 눈 밝은 독자가 아니라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하면서도 고급스런 은유와 복선이다.

도박중독에 빠져 아이까지 팽개치고 낯선 사내를 따라 여관에 들어서는 유부녀, 자신의 꿈을 혁명에서 돈으로 바꾼 영악한 386세대 출신 사업가, 일찌감치 세상에 절망한 조로한 천재소녀….

차가운 세계인식과 냉소적 시선... 그의 미래가 궁금하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철학자들은 말해왔다. "세상은 불합리와 불가해로 가득 찬 아비규환의 지옥"이라고. 신경진과 그의 소설 <슬롯>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지옥에서 탈출할 열쇠를 지녔는가?" 그리곤 자답한다. "허나, 벗어나 봤자 우릴 기다리는 건 이름만 달리한 또 다른 지옥이다."

ⓒ 세계일보 제공
지레 독자를 도덕적 교훈이나, 조잡한 성찰로 이끌지 않는 차가움이 근사하다. 이런 냉소적 세계인식은 이 작가의 미래를 낙관케 하는 한 근거다. 그렇다. 소설은 도덕교과서가 아니지 않은가.

<슬롯>에 월계관을 씌워준 심사위원 중 한 명인 박철화 중앙대 교수(문학평론가)는 "무엇보다도 잘 읽힌다. 소설이 이야기라는 점을 떠올리면 좋은 덕목이다… 고전과 도발의 균형이라는 도박에서 멋지게 승리한 작품"이라는 상찬을 신경진에게 보냈다.

"일본 소설의 국내 시장 점유율이 과반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 흐름을 돌리는데 작은 역할을 맡고 싶다"는 신경진이 박철화의 찬사에 값할 소설을 다음에도 써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문이당(2007)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