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행을 떠나가기로 한 날, 하필이면 비가 올 게 뭐람. 큰 비는 아니지만 아침부터 보슬보슬 비가 내린다. 날씨도 우리 두 사람의 여행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을까?
일단 비가 그친 다음 움직이기로 했다. 오전에 아내가 복지회관 주방봉사를 다녀오고 나서 오후 2시쯤 비가 그쳤다. 그동안 나는 행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아는 데는 산밖에 없는데…' 막상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내가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
"당신 가고 싶은데 있으면 말 해!"
그러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본 데가 있어야지. 아내는 일단 떠나자고 한다. 그러나 무작정 떠날 수도 없고 다시 제안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부산 어디 좋은 데 가서 하루를 묵고 올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신혼여행 갔던 경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통영이나 거제도 쪽으로 바다 구경하고 올 것인가… 이 셋 중에서 하나를 택해봐. 나는 당신이 결정하면 무조건 따를 테니…."
그러자 아내는 인터넷으로 여행정보를 알아보는데, 이러단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 빨리 결정해요. 자꾸 시간만 가잖아. 지금부터 10분 이내로 결정해요!"
그러나 아내는 아무 곳도 결정하지 못했다. 1박2일의 짧은 여행이므로 준비도 간단했다. 갈아입을 속옷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냥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차에 시동을 걸고 일단 방향을 통영으로 정했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다 마음이 바뀌면 할 수 없는 것이고….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시디플레이어에 바흐 음악을 넣었다. 부드러운 음악만큼 아내의 표정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남해고속도로를 지나 개통한 지 얼만 안 된 통영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22년 세월만큼 빠른 속도로 통영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이 닿았는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제도'하고 외쳤다. 첫 목적지가 거제도로 바뀐 것이다. 아내는 청마 유치환 선생 생가에 가보고 싶어 했다. 아내는 처녀시절, 청마 선생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마당 오른쪽에 두레박 우물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우물에 얼굴을 넣었다. 우물 속으로 낯익은 얼굴이 웃는다. 아내가 말한다.
"여보, 그래도 우리 참 오래 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까?"
맑은 햇살이 간간히 비친다. 우리네 사는 것이 흐린 날이 있으면 밝은 날도 있듯이….
해안도로를 돌았다. 마치 강원도 산길처럼 길은 굽어있었다. 차 오른쪽으로 바다와 옹기종기 나지막한 집들이 정겹게 펼쳐진다. 모든 풍경이 익숙하고 평화롭다. 해거름, 아내의 얼굴은 저녁노을처럼 붉었고, 새색시처럼 자꾸 웃는다. 지금 아내는 행복한 것일까?
거제도에 사는 친구와 전화연결이 되어 친구로부터 융숭한 저녁대접을 받았고, 우리 내외는 몽돌해수욕장 전망이 좋은 어느 모텔에 잠자리를 정했다. 아내는 밤바다가 보고 싶다고 한다.
밤바람이 세다. 파도는 일정한 리듬으로 타며 '쏴아 쏴아' 앞으로 돌진한다. 아내가 밤바다를 향하여 돌아서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아내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울고 있었다. 분명 그랬다. 22년의 세월의 무게가 그만큼 힘들게 했을까?
숙소에 들어와서 아내가 말한다.
"당신, 마누라 잘 만난 줄 알아? 당신 나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처럼 두 사람이 애들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밤늦게 옛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가 먼저 잠들었다. 가는 세월을 붙잡아 둘 수 없었겠지. 아내가 많이 늙었다. 주름살투성이다. 고단했던지 코를 곤다. 부부가 늙으면 오누이처럼 닮는다고 하던데, 우리 두 사람도 처음보단 많이 닮았다. 아내의 자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두 사람, 곱고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좋겠다. 내가 어쩌다 이런 행운을 타고 늙고 있는지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두 사람, 더 늙어서도 더욱 깊은 기쁨과 설렘의 골짜기에 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바다는 연신 '쏴아 쏴아' 깊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